작업물/글
[아이마스SS]열차 안에서
하루카와 치하야가 열차 안에서 수다를 떨 뿐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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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하루카. 듣고 있어?"
덜컹이는 전철 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어슴푸레한 실내등보다도 환하게 열차의 좌석을 비춘다. 옆에는 치하야 짱. 그리고 그밖에는 아무도 없다.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미안. 잠깐 망하니 있었어."
"하루카도 참……. 어제 라이브 회의 했었다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라이브. 그러고 보면 그랬었지. 다음 달에 나와 유키호 짱과 히비키 짱이 함께 나가는 무대다. 세트리스트는 결정됐지만 세세한 부분이 아직 미정이라, 어제 그걸 결정하는 회의를 했다. 요즘은 계속 바쁘니까 프로듀서님까지 다같이 모인 건 꽤 오래간만이었다.
"음……. 역시 마무리가 덜 됐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조금 얕보고 있었는지도."
"후후, 왠지 하루카라면 그럴 것 같았어. 이것 저것 다 하고 싶은데 시간은 제한돼 있으니까, 결국 뭘 넣고 뭘 뺄지 못 골랐지?"
역시 치하야 짱. 날카롭다. 꼭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치만 모처럼 있는 라이브잖아. 되게 오랜만에 한다는 느낌이라 무심코 기합이 들어간다고 할까."
"무슨 소리야. 저번 라이브에서 아직 두 달도 안 지났어."
"어, 거짓말! 한 반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치하야 짱이 말하는 두 달 전의 라이브를 떠올린다. 음, 분명 올스타 라이브였다. 새 의상, 신곡 발표, 새 유닛 기획……. 여러 가지 도전을 시도한 라이브였다. 약간의 기자재 트러블은 있었지만, 응. 솔로곡을 부르는 치하야 짱의 모습을 무대 뒤에서 모니터로 지켜보았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안 지났다니까. 하루카도 참. 오히려 왜 벌써 다음 라이브 기획이 잡혔는지가 신기할 정도야."
"그러게. 또 레슨하다 늦어지면 치하야 짱네서 재워줘~."
"애초에 그런 일이 없게 시간을 잘 확인하는 게 어때……."
뭐, 재워 달라고 말은 하지만 정말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치하야 짱네서 자고 싶다기보다는, 치하야 짱이랑 더 많이 놀고 싶은 거다. 계속 같이 그렇게 놀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왠지 옛날 생각 난다. 언제였더라…. 내가 하루카네 처음 놀러 갔을 때 말야."
"아, 그때 말이지. 설마 정말로 올 줄은 몰랐는데. 우리집 머니까."
조금 오래 전 일이지만, 주말에 오프가 겹치니까 같이 놀자는 약속을 했었다. 장소를 어디로 정할까 이야기하던 중에 자기 방으로 해도 좋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문득 떠올라 우리집은 어떠냐고 말해 봤다. 늘 내가 치하야 짱네 놀러 가고 있으니 가끔은 반대로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말하자면 변덕이었다. 편도로 2시간이나 걸리니까 거절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정말로 집까지 찾아와 주었다.
"그땐 미안. 자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아냐, 같이 출근하는 것도 재밌었고. 거기 막차가 이르니까, 조금만 늦어도 돌아갈 차가 없어져버리곤 하거든."
"후후. 맞아. 같이 놀았던 것도, 같이 잤던 것도, 출근했던 것도 재미있었어."
"귀중한 치하야 짱의 웃음도 잔뜩 봤고 말이지~."
"잠깐, 하루카. 그건 네가 간지럼 태운 거였잖아. 그거 웃음으로 치는 거야?"
"아차,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역시 치하야 짱은 이상한 데서 기억력 좋다니까."
"이상한 데란 말은 빼는 게 어때. 그리고 내가 하루카와의 추억을 하나라도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치하야 짱은 부끄러운 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하니까 좀 치사하다. 늘 그런 말에 당황하는 건 나뿐이고.
이번에도 치하야 짱은 그런 나를 보면서 왜 그러는 건지 정말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얼굴은 의사와는 상관 없이 새빨개진 상태다.
치하야 짱은 잊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나도 앞으로 이 추억들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풍화돼 옅어져,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떠올릴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치하야 짱이 아무리 기억해 준대도 내가 잊어버려선 의미가 없다. 그것이 섭섭하고 두려웠다.
"그나저나. 그땐 정말 깜짝 놀랐다구. 설마 치하야 짱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나야말로. 하루카가 받아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에헤헤…. 치하야 짱을 좋아하니까."
치하야 짱이 놀러왔던 그 날. 저녁 식사 후에 방 안에서 과자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을 때. 갑자기 치하야 짱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도 치하야 짱을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괜시리 부끄러워져서 치하야 짱을 마구마구 간지럽히고 괴롭혔다. 한참 그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이미 막차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상이다.
정말로 그것 뿐이다, 응.
"하루카, 얼굴이 새빨개."
"누구 때문인데. 아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치하야 짱은 하나도 안 부끄러워하는 거야? 비겁해!"
"이제 와서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지 않나 싶어서. 그치만 나중에 그런 일이랑 저런 일이랑……."
"그만! 그만해, 치하야 짱! 나를 수치로 죽일 셈이지 그렇지?!"
내 항변에도 불구하고 치하야 짱은 쿡쿡 웃으며 "하루카, 귀여워."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정말, 비겁하다.
"아, 맞아. 며칠 전에 타카네 상이 말야. 고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어봤었는데. 기운 없어 보인대. 나 그래 보여?"
"글쎄. 평소랑 똑같은 것 같은데. 한참 못 봤으니까 그 사이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만난 거 되게 오랜만이지. 라이브 이래로 처음 아냐? 두 달 좀 안 됐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시간 참 빠르네."
그동안 전화도 문자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치하야 짱은 요즘 어때? 별 일 없어?"
"나야 늘 똑같지 뭐. 노래하고, 운동하고. 요즘은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아하하. 치하야 짱은 정말 변하질 않는구나."
그녀다운 답변이 돌아온 것에 만족하면서 진심에서 나오는 웃음을 짓는다. 그녀가 평소대로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다. 됐을 거다.
"그러는 하루카는 어떤데? 시조 상이 걱정했었다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음~ 글쎄. 안 좋은 일이야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까. 치하야 짱이 옆에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래. 미안해."
"으응. 치하야 짱은 잘못한 거 없어."
나는 배시시 웃으며 치하야 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그녀가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살짝 내게 기대서, 쓰다듬 받는 걸 즐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동안 가만히 그러고 있었다. 무척 따스하고 평온한 시간이었다. 규칙적으로 전철이 덜컹이는 소리만이 지배하는 침묵의 공간. 하지만 침묵으로도 전해지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긴 시간인지 짧은 시간인지 모를 포근한 시간이 지나고, 치하야 짱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선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역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이 아니면 까먹을 것 같으니까 지금 말할게. 고마웠어, 하루카."
"갑자기 왜 그래, 치하야 짱. 새삼스럽게."
"고맙다는 말은 있지, 고마움이 당연한 게 돼 버리면서 잘 안 하게 되잖아. 예를 들면 하루카가 곁에 있어 주는 거나. 하루카가 날 좋아해 주는 거나. 하루카가 날 걱정해 주는 거나."
"전부 내 얘기 뿐이잖아."
기껏 잠잠해졌던 홍조가 다시 얼굴에 떠오른다. 오늘 치하야 짱은 유난히 부끄러운 말을 많이 한다.
"그러니까, 고마웠어, 하루카. 늘 내 곁에 있어 줘서. 늘 내게 미소지어 줘서."
"뭘 마지막처럼 말하는 거야. 앞으로도 난 치하야 짱 곁에서 미소지어 줄 거야."
"……응. 그렇지. 앞으로도 잘 부탁해."
치하야 짱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아마도 없다. 역에 도착하면 그걸로 끝. 우리는 거기서 이별하는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도 어떻게 답할 순 없지만. 내 안에는 그런 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녀가 붙잡은 손을 맞잡는다. 전해져 오는 분명한 온기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두 달 가까이 느끼지 못했던 치하야 짱의 온기가, 여기에는 있다.
손의 감촉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열차는 천천히 감속하기 시작했다. 역이 코앞에 온 모양이었다.
"하루카. 난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너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도. 내가 걸어온 이 길도. 절대로."
"치하야 짱, 하지만 난, 난……."
조금 전의 생각이 되살아난다. 치하야 짱이 잊지 않더라도, 내가 잊어버려선 전부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와 그녀만이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의 추억. 우리가 이별하고 나면 내 기억속에만 존재하게 될 과거. 내가 잊어버리면, 전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 품은 여전히 따스했다.
"괜찮아.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우리가 걸어온 시간은 고작 그 정도로 엷어져 사라질 만한 거였어?"
"……으응."
"내가 잊지 않는 것처럼, 하루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더라도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응."
"걱정하지 마. 떨어져 있어도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응."
내 자그마한 수긍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열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열차와, 아무도 없는 승강장.
"벌써 도착해 버렸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치하야 짱은 포옹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나도 따라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쫓는다.
아아, 이 시간이 끝나고 만다. 오랜만에 맛보았던 그녀의 온기가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열차 안을 걷는 사이에 문이 열렸다. 구석에 보이는 역 이름이 적힌 간판. 처음 보는 이름이었지만 납득이 갔다.
치하야 짱은 망설이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는 내릴 수 없다. 내려선 안 된다. 그것은 분명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 될 테니까.
치하야 짱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이별을 되뇐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빛바래지 않도록.
"사랑해, 치하야 짱. 잘 가."
"안녕, 하루카. 나도 사랑했어. 잘 지내야 해."
뒤돌아보며 짓는 미소가 눈부시다.
나는.
이 미소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 벨이 울리고 문은 닫힌다. 그녀의 모습이 문틈으로 사라진다.
아아, 나는,
나는…
"…윽!"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숨이 무시무시하게 거칠다. 땀에 젖은 잠옷이 달라붙어서 기분 나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꿈?
그런가, 그건 꿈이었나.
그야 그렇겠지.
치하야 짱은 이제 없으니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치하야 짱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사무소 동료들도, 프로듀서님도, 사이가 나쁘다고 했던 그녀의 부모님도 모두가 진심으로 슬퍼했다.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지만, 내 감각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장례식이라는 분명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치하야 짱은, 죽은 것이다.
라이브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솔로곡을 부르는 도중, 갑자기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낙하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무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큰 소리와 함께 관객의 비명이 들렸다. 분명 모니터로 보고 있었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잠깐 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고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그 날의 풍경은 뇌리에서 떨어져 주지 않는다. 지금도 꿈에서 그 광경을 보곤 한다.
하지만 오늘 꿈은 전혀 달랐다.
땀에 젖은 잠옷 위로 양 팔을 끌어안는다. 더이상 그녀의 온기는 거기에 없었다. 별 생각 없이 핸드폰의 캘린더를 본다. 벌써 반 년이 넘게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라이브. 하지만 실제로는 고작 7주,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어라……."
그때,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캘린더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
7주. 날짜로 따지면 49일. 그래, 오늘은 치하야 짱이 떠난지 49일째가 되는 날이다.
저승에서 매주 치뤄지는 심판이 끝나는 날. 다시 말해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가 결정되는 날.
"……아."
꿈속의 풍경. 열차가 멈추었던 역. 그녀의 뒷모습. 역의 이름은――
"――그렇구나. 다행이다."
나는 치하야 짱을 떠올리며, 기쁨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던 웃음을, 그녀에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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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하루치하라고?
하하, 속았지!
...안녕하세요, 카와즈입니다. 속아 주셨나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른, 그런 소설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로 치하야 짱이 어, 음... 그렇습니다.
다음에 소설을 쓸 때는 정말로 정말로 사고가 나거나 누가 죽거나 누가 아프거나 그런 건 안 하고 싶네요. 스스로의 상상력의 빈곤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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