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물/번역
[아이마스SS]이 마음을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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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원작자의 허가를 받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픽시브에서 타마키 하야테(珠樹 颯)님이 연재하신 소설입니다. 허가를 받고 카와즈(かわづ)가 번역하였습니다. 원작자의 허가로, 이 소설은 작가와 번역가의 이름, 출처를 명기하면 전재가 가능합니다.
또한, 이 소설에 코멘트된 감상은 원작자에게도 전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설의 원본 주소 : http://www.pixiv.net/novel/show.php?id=4717576
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それは、裸足のままの恋でした)
10. 이 마음을 하늘에
※이 소설에서는 이름 뒤에 붙는 모든 호칭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링크]를 참조하세요.
조금 떨어진 차도를 휙 휙 달려가는 자동차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일본보다 조금 빠르게 설정된 제한속도를 더욱 오버해 있을 그 속도보다도, 애초에 차가 달리는 방향, 진행방향이 반대다. 마치 거울에 비친 세계처럼. 조금 눈부신 노을의 햇살이 영어만 가득한 표지나 건물 간판을 비추었다. 촬영이나 조명 기재를 들고 우리들을 둘러싸듯이 서서 렌즈나 빛을 향하는 사람들은, 피부색도 얼굴 모양도 여러 가지이고.
내 눈앞에서 연기를 계속하는 미키는 그런 가운데서도 어디까지나 미키였다. 미키이고, '에리'였다. 원래 사람 눈을 끄는 가지런한 이목구비에만 의존하지 않는, 섬세하지만 정열이 담긴 연기. 그녀가 연기하는 '에리'에, 스탭 몇 명이 카메라를 돌리면서, 혹은 음향을 만지면서 감탄을 흘렸다. 몸짓이 큰 화려한 신이 아니다. 하지만 이국땅의 가짜 무대에서 '에리'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숨을 쉬고, 고민하고, 어깨에 맨 가방을 고쳐 맨다. 지금 세계의 중심에 그녀는 있었다.
거기에 내가 들어간다. '에리'의 눈이 나를 발견하고, 의문과 놀람, 그리고 불안에 흔들렸다.
"노조미……?"
작은 신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이름이 불려서, 내 발이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쓸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정면에서 바라본다.
"에리, 그 사람은 여기엔 안 와."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일까.
어째서, 였을까.
아니, 그야 알지. 몇 백 번이나, 천 번 쯤은 대본을 읽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쓰여 있었어.
하지만, 어째서. 네가 쫓아가지 않아서? 그 사람이 결정한 일이라서? 내가 잘못해서?
"――――"
입을 열고 대사를 말해보지만 잘 와 닿지 않는다. '노조미'의 말은 이게 맞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 언제나 자그맣게 흔들리던 두 개의 리본은 거기에 없었다.
약간 정지한 공간을 감독의 목소리가 갈랐다. 통역을 들을 필요도 없다. 안 됐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다음 테이크를 위해 스탭들이 움직임을 되찾는다. 대신 내 시간이 멈춘다.
"하루카……?"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미키다. 미키로 돌아온 미키다.
"미안, 미안! 실수해버렸어……. 다음엔 괜찮을 거야, 괜찮아."
유감스럽게, 하지만 조금 실없이 웃어 보이는 건, 나. 하루카로 돌아온 하루카. 그럴 거다.
그럼 아까 여기에 있던 건? '노조미', 아니면 '하루카', 아니면 다른 누군가?
아니, 애초에 누군가가 여기 있었던 걸까. 내가 있을 곳은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럼 지금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노조미'가, '하루카'가. '나'는?
――나는, 누구일까.
익숙하지 않은 빌딩 너머로, 해가 저물어 간다.
………
……
…
할리우드에 오고 나서 슬슬 1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나와 미키가 촬영에 참가한 영화는 11월 말 들어서 촬영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난 할리우드 영화라고 하면 두두두두두 와장창 펑 하고 대폭발! 그런 아메리칸 적인 조크로 하하하, 그런 이미지가 강했지만 물론 영화가 그런 것만으로 성립될 리는 없고.
대충 말하자면 미키와 나는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란 설정으로, 미국에서 만난 스파이 비슷한 하드 보일드한 맨과 음모 권력이 소용돌이치는 사건에 휘말려서 여차 저차 해서, 역시 하하하 투쾅 하는 것도 있지마는. 거기에 약간 러브 로맨스 요소도 포함돼 있다. 물론 영어로 말해야 하는 장면도 많지만, 잉글리쉬 어휘가 늘었냐고 물으면 보시는 대로다. 핫핫하.
……웃으려고 해도 입 안이 마른다. 분위기를 띄울 웃음도 폐가를 덜걱이는 외풍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요 며칠간 찍고 있는 신이 러브에 관련된 부분이라, 영 잘 되질 않는다. 주로 나 때문에. 그렇다기보단, 전부 나 때문에.
분함, 있다. 면목 없음, 있다. 하지만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차피 난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포기가 있다. 난 어떻게 돼 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나는 내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를 눈치 채고 있기도 하다. 단지 눈을 돌리고 있을 뿐. 요 1개월, 계속 그렇게 해 왔듯이. 생각해 버리면 해결이 되기는커녕, 몸이, 머리가, 움직이길 포기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촬영과 미팅이 끝나고 해산할 즈음, 난 도망치듯이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날은 진작 저물었지만 바깥도 그다지 춥지 않다. 그래도 코트 앞을 여미고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걸어 나간다.
"하루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확인할 것도 없이 미키였다. 그녀 목소리를 착각할 리도 없고, 애초에 이 땅에서 귀에 익숙한 인토네이션으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미키. 무슨 일이야."
"어, 그게. 무슨 일이 아니고."
미키는 웬일로 말끝을 흐리고, 시선을 조금 떨어뜨린 채 종종걸음으로 내 옆으로 왔다. 정확히는 옆이라기 보단 반걸음 정도 뒤로.
한동안 말 없이 걷는다. 자기가 말을 꺼내면서도 어찌할 생각도 없었던 거겠지. 난 지금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돌아간다. 미키도, 옆인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그것뿐이다.
갑자기 미키가 대담해졌나 싶더니 내 앞으로 돌아왔다. 왜인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있지, 하루카. 역시 요즘 이상해. 무슨 일이야?"
"……난 나야, 평소랑 똑같아."
미묘하게 동문서답이란 걸 자각하면서도, 아까 내가 물었던 것과 같은 물음에 답해 본다. 미키는 역시 납득해 주지 않았다.
"아니야. 그런 건 하루카가 아니야. 하루카답지 않아. 하루카 연기는, 그런 게 아냐."
"아하하…….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면 꽤 기분 상하는데.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어. 연기가 형편없게 보였다면 그게 내 한계인 거야. 미안, 내일은 폐 안 끼치게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그런 게 아니고……."
미키가 내 말을 자르고서 떼를 쓰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고르면서 입을 뻐끔거린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안다고 인정해선 안 됐다.
"미키, 그래선 잘 모르겠어."
그러니 나는 모르는 척을 한다. 그밖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카는, 애초에 더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못 하는 것도 늘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해 왔잖아."
"잘 못 하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이야? 내 발목 잡지 말라는 그런 의미야?"
"아니라니까! 있잖아, 지금 하루카가 열심히 한다는 건 뭐야? 내일이 되면 뭐가 어떻게 변한다는 거야!?"
미키가 필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다가왔다. 덕분에 앞으로 갈 수가 없다.
"――내일은, 어떻게든 할게. 열심히 할 테니까."
그녀의 등을 옆으로 우회해서 돌아가는 길을 걷는다. 열심히 할 테니까. 촬영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해 낼 수 있도록. 빨리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나.
딱히 빨리 귀국하고 싶지는 않은데.
난 지금 어딜 향해 걷고 있는 걸까.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하루카!"
다시 미키가 쫓아온다. 일을 끝나고 돌아가는 중일, 양복을 입은 키 큰 백인 남자가 우리를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있잖아, 하루카는 뭘 고민하고 있는 거야? 통역가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감독님 연기 지시는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고――"
"으응. 나 때문이야. 그건 제대로 알고 있어."
"하지만! 얼마 전까지 찍었던 신은 좋았잖아! 요 며칠이야, 하루카가 이상해진 건.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리 숨기려고 필사적이어도. 역시 미키한테는 들켜 버렸네.
요 며칠 찍고 있던 장면. 노조미에게, 에리에게, 중요한 요소일 마음의 동요.
"……있지, 미키. 사랑이란 뭘까."
"엄청 좋아한다는 마음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내 말에 미키가 바로 답했다. 당연하단 듯이 말하고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키가 눈부셔서, 눈을 돌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 거야?"
"……미안해. 뭔가, 잘 모르게 돼 버려서."
"사과 받아도 곤란한데. 하루카는 사랑을 한 적이 없어?"
"어땠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네."
으으음 하고 고민하는 미키에게 쓴웃음을 짓는다. 정말로 미안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걸 물어봐서.
"하루카는 사랑을 알고 싶은 거야?"
"으음. 몰라도 어떻게든 해 왔는데 말야. 솔직히, 알고 싶지 않은 걸."
"왜?"
"……왜, 일까. 정말로 모르겠어."
"흐응."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미키가 내 몇 걸음 앞을 걸었다. 그 머리가 붕 휘날리고, 엷은 녹색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똑바로 날 바라봤다.
"저, 하루카. 키스할까."
"――에에에에에에에엑!?"
그 갑작스런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미키는 신경 쓰지 않고 쑥 거리를 좁혀 왔다.
"누, 누가? 누구랑!?"
"하루카가. 미키랑."
"아니아니아니, 왜 그렇게 되는데! 노조미랑 에리는 딱히 키스 같은 거 안 하잖아!?"
"맞아. ――왜?"
"왜냐고 내가 묻고 있는데……."
"하루카의 왜는 의미가 없으니까, 미키의 왜에 대답하는 거야. 있잖아, 왜 노조미랑 에리는 키스 안 해?"
"그, 그건……. 둘 다 여자, 고?"
"그런가. 그럼 하루카는 미키랑 키스, 할래?"
장난을 치는 건가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 진지했다. 미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만다.
"미, 미키는 나랑 키스하고 싶어……?"
"싫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빠질 뻔했다. 아니, 나는 어디에서든 넘어지기는 하지만요? "별로"도 "안 해"도 아니고, "싫어". 확실한 거절. 뭐야, 그게.
"미키는 뭘 하고 싶은 거야."
"미키는 어떻든 상관없어. 있지, 하루카는 미키랑 키스하고 싶어?"
"아, 아니, 그건 좀……."
"하루카는 미키가 싫은 거구나."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왜 그럴까."
그렇게 중얼거리고, 미키가 빙글 돌아 내게 등을 돌렸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두고 그녀는 다시 걸어가면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키는 하루카도 꽤 좋아하지만."
"그, 그건 고맙네."
"――허니 말고는 키스하고 싶다곤 생각 안 해."
"…………."
표정이 보이지 않는 미키를 쫓아서, 이제 생각난 것처럼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빨간 신호로 그녀가 멈추어도, 왠지 난 그 옆에 나란히 설 수가 없었다.
"……하루카는 있잖아."
"응?"
"누구라면 키스 할 수 있어?"
"어려운 질문인데."
"허니?"
"그건……어떨까. 아닐, 까."
"다행이다. 하루카가 허니랑 키스하고 싶다고 말했으면, 카메라도 안 돌아가는데 하루미키동이 발발할 뻔 했어."
"뭐야, 그게. 새로운 동부리야?"
"별로 맛 없을 것 같아. 그게 아니고, 대전쟁. 할리우드 거리가 몽땅 불타 버려."
"그, 그건 확실히 큰일이네……. 필름 속에서만으로 충분해."
"응. 무사히 평화롭게 끝날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런데 허니가 안 된다면――치하야 상은?"
미키가 날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심하게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안 보이고 끝났으니까.
"……왜 치하야 짱 이름이 나오는데?"
"하루카, 치하야 상하고 사이 좋잖아."
"그, 랬지. 하지만 치하야 짱한테, 난 이제 친구도 뭐도 아니란 것 같고."
목소리가 떨리는 걸 필사적으로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해 본다. 미키는 조금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고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자마자 "흐응."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역시 흥미 없다는 듯이 횡단보도의 하얀 선을 밟았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 이상 대화는 없었다. 방 앞에서 헤어질 때 "내일도 열심히 하자."하고 웃어 준 미키의 표정이, 자기 전까지 내 마음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일상에서 도망치듯이 닻을 올리고 한때의 꿈속으로 노를 저어도.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몇 개의 사슬에 묶인 채.
나는 내일도, 여기에 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다음날도 만족스런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시종일관 불만스런 표정을 한 감독님. 반복되는 리테이크에 피곤을 감추지 못하는 스태프님들. 어두운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보는 미키.
떨쳐낼 수 없는 뭔가에 발을 묶인 채인 내가, 주변 사람들 모두를 한 점에, 이 장소에, 못박고 있다.
내가.
나 때문에.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을 벽에 손을 짚으면서 걸어가는 느낌. 똑바로 걸어가고 있을 텐데, 필사적으로 걷고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지나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터널이 계속되는 것도 아닐 텐데.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 끝이 날 텐데.
애초에 이 터널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걸까. 애초에 이 길이 맞던가?
피로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가 끈적하고 무겁게 달라붙어서, 하루를 끝낸 몸이 코트를 벗기도 전에 침대 위에 털썩 떨어졌다.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크게 한숨을 쉰다. 던져놓은 가방을 뒤적거려서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어슴푸레한 조명 밑,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부재중 전화가 없었던 걸 확인한다. 새로 온 메일은 4개. 야요이와 마코토, 일과 관련된 게 2개.
……딱히. 기대 같은 건 안 했고. 아무것도.
간단히 그것에 답신을 하고 핸드폰을 내던지려다――다시 대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1월 31일, 22시 11분. 표시된 시각이 올해 마지막 달이 시작될 때까지 2시간도 안 남았다는 것을, 특별히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담담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12월이 되어도 특별히 뭔가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내일도 난 여기에 있고, 내일은 꼭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연기를 해야 한다. 바뀌는 건 아니지만, 바꾸어야만 하는 건 있고. 자꾸 꼬이는 내 손가락은 내 의식과 관계없이 멋대로 전화번호부를 불러냈다.
별 생각 없이 터치스크린에 올린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미끄러뜨린다. '아'부터 시작되는 연락처가 주르륵 흘러간다. 그 동작을 벌써 세 번째. 그리고 스크롤된 화면에 놓인 엄지손가락 바로 밑, '왠지 모르게' 거기에 있는 연락처 하나.
‘치하야 짱'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자조하듯이 일그러진 입술이 베개에 쓸렸다.
요 1개월, 한 번도 전화도 메일도 한 적 없는 연락처.
요 1개월, 한 번도 전화도 메일도 오지 않은 연락처.
10월 마지막 날에 "좋아해."라고 말해 주었던 사람.
그리고 동시에, "이젠 친구도 아니야."라고 내게 말했던 사람.
생각하지 않으려. 생각하지 않으려 해 왔다. 그 상처를 들여다보면, 이젠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워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일은 커녕 호흡조차 못 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 할로윈 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뭘 위해 날 거절한 것인지.
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했는지.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건지.
그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인지 너무도 무서웠다.
도망치듯이 다시 엄지손가락을 움직인다. 금방 그녀의 이름은 위쪽으로 흘러 화면에서 사라지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마다 다른 연락처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또 다른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 손이 멈추었다.
특별히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도 내 고민을 들어 주고, 등을 떠밀어 주었던 사람.
……상담을 해 봐야 할까. 하지만 뭘? 일을 잘 못 하고 있는 것?
아니면.
윗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아이콘을 터치하고, 귀에 핸드폰을 댔다.
『――하루카니?』
"프로듀서, 님……."
두 번째 콜 소리보다도 빨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흔들었다.
『음, 그 쪽은 어때? 몸은 괜찮니?』
왠지 초조한 것 같으면서도 배려가 담긴 목소리가, 지금 엉망인 내 사고를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저……네. 괜찮아요. 모두들 잘 지내요?"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얄팍한 허세와. 덤처럼 덧붙인 물음.
『이쪽은 평소랑 똑같아. 다들 착실하게 해 주니까 일은 계속 늘어나는데 점점 내가 할 일은 편해지고 있어.』
농담 같은 오랜만에 듣는 프로듀서님의 목소리. 그런가. 평소랑 똑같구나. 다들. 그녀도. 기쁜 것 같은, 쓸쓸한 것 같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해서 시선이 바닥 한 점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 하루카는 뭔가 힘든 일 없니?』
"――아하하, 딱히 없어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일부러 전화까지 걸고, 뭔가 있었나 싶어서.』
"좀 프로듀서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런 건 안 되나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스피커에서 우물우물, "뭐야, 그게.".
『별로 난 상관없지만 말야, 고맙게도 잠깐 잠깐 시간도 나고. 하루카 얘기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게.』
"고맙습니다. ……그럼 조금만, 말씀대로 할게요?"
미키와 다른 배우들과 휴식 중에 있었던 콩트 같은 이야기. 미국에서 발견한 신기한 과자 이야기. 여기 TV 프로그램 이야기.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프로듀서님은 맞장구를 치면서 들어 주셨다.
완전히 이런 얘기의 흐름에 익숙해져 버렸을 즈음이었으니.
『그렇구나. 그래서 하루카는 그때 왜 그렇게 생각했니?』
갑자기 프로듀서님이 내게 질문을 던졌을 때, 바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게, 저요?"
『응.』
"전, 그게……무슨 얘기였죠?"
『야…….』
어이없단 목소리로 말하는 프로듀서님.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나'에 대한 얘기.
『난 무슨 얘기든 상관없는데――그게 하루카가 하고 싶은 얘기면."
나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가 아닌데. 프로듀서님의 말이 아프게 느껴졌다. 마치 내 지금 상황을 다 들킨 것만 같아서.
"어, 그러니까……. 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요……."
『――하루카?』
필사적으로 감춰 두었을 텐데.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눈치 챈 건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뭘 하고 싶었더라……."
이제 그만둬야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해도 멈추질 않는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전거가 언덕길을 내려가듯이.
"저, 아이돌 안 하는 게 나았을까요……."
『뭐? 』
"――어?"
스피커에서 들려온 놀라는 소리보다도 내가 놀라는 소리가 더 컸다.
뭐야,
지금 그거.
침대 위에 상반신이 털썩 떨어졌다.
안 돼.
이럼 안 돼.
튀어 오르듯이 일어서서 핸드폰을 꼭 쥐었다.
"죄송해요, 프로듀서님. 저 뭔가 좀 지친 것 같아요."
『야, 하루카――』
"내일은 열심히 잘 할게요. 이제 꽤 추워졌으니까, 프로듀서님도 몸조심하세요."
연달아서 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어두운 창밖을 바라본다.
지금, 난.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어째서.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난 계속 아이돌이 되고 싶었고.
아이돌이 됐고.
그리, 고――?
내게 소중했던 것이, 지금 있는 이 장소가, 발밑부터 무너져 내리듯이.
아니다. 아닌데. 제대로 서 있어야 하는데.
모르고 있었다. 전혀 깨닫지 못했다. 어느새 난 이런 곳에 있던 걸까.
치하야 짱에게서 도망치고. 생각하는 것에서 도망치고. 현실에서도 도망치고. 프로듀서님에게서도 도망치고.
하지만 내가 제일 많이 도망쳤던 건.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빛나지 않는 핸드폰을 꼭 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드디어, 알았다.
하지만 내겐 분명 아직 깨닫지 못한 게 있다.
………
……
…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12월에 들어서는 별 문제 없이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내 연기가 개선된 게 아니라. 꽉 막힌 그 장면을 나중으로 돌리고 다른 신을 찍기로 감독님이 정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제는 미뤄지고 어떻게든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로 끝. 내일부터는 다시 '노조미'의 심정을 찾아내야 하는 장면 촬영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솔직히 난 아직도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 요 3주간 결국 자신에게서도 눈을 돌리길 계속해 왔다.
그런 일요일인 오늘이 어떤 날인가 하면.
오랜만에 하루 종일 오프라서, 난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도 특히 번화한 거리에 쇼핑을 하러 왔다. 안 그래도 화려한 거리는 며칠 남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장식으로 더욱 반짝이고 있다.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비가 온다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좀 그래서, 기분 전환 삼아 메트로버스에 탄 게 몇 시간 전. 메트로라고 하면 지하철이란 이미지 밖에 없었지만, 버스는 물론 땅 위를 달린다. 몇 개의 루트로 드넓은 로스앤젤레스를 종횡무진 달린다. 여기에 오는 데에도 꽤 고생했고, 익숙하지 않은 도로 감각과 변변찮은 영어뿐인 장비로 무사히 호텔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
큰 사거리에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본다. 저쪽은 아까 점심을 먹었던 카페니까, 이번엔 다른 쪽으로 가 볼까. 하지만 너무 멀리 가서 미아가 되는 건 싫고…….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시야에 비치는 제일 높은 빌딩을 향해 걸어 보기로 했다. 가방이 비를 맞지 않게 잘 끌어안고 걷기 시작한다. 평소에 쓰는 것보다 좀 큰 가방이라서 신경을 쓰며 걷는다. 쇼핑하러 가는 거니까 큰 가방이 좋겠다 싶어서 가지고 나왔지만, 미국에 올 때 기내에 가지고 들어갔던 가방이라 그 때 물건이 뒤섞여 들어 있어서 별로 물건을 넣을 자리가 없다. 말하자면, 이 가방을 가지고 나온 의미가 없다. 더 말하자면 결국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샀으니, 애초에 밖에 나온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혼잣말을 해 본다. 분명 중얼거리는 게 주변의 누군가에게 들렸다고 해도 일본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안심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아, 하지만 말의 의미는 몰라도 이상한 사람이라곤 생각할까. 그만하자, 혼잣말.
12월도 하순에 접어들었지만 그렇게 춥지는 않다. 이쪽은 아직 최고기온이 간단히 20도를 넘기도 하니까. 눈으로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비가 톡 톡 우산을 때린다.
조금 걸어가다가, 위만 바라보던 시야 구석에 일본 글자가 보여서 '오'하고 놀랐다. 이건……일식집? 로스앤젤레스엔 미츠코시 같은 일본 백화점이 없어서 일본인이 고향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장소도 꽤 한정돼 있다. 조금 전에 식사를 한 참이지만 왠지 내 발은 그 가게로 끌려갔다.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자. 표지로 삼은 빌딩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으앗."
넘어졌다. 발 밑 주의가 소홀해져서 단차에 걸려 버린 것 같다.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져서 속에 든 것들이 널브러져 버렸다. 지붕이 있는 데라 정말 다행이다. 무슨 일인가 이쪽을 바라보는 점원에게 쓴웃음을 짓고, 굴러다니는 지갑이니 지도니 하는 것들을 주워 간다. 그 손이 마지막으로 본 적 없는 봉투에 닿았다.
어라, 내가 이런 걸 가방에 넣어 뒀던가? 주워 보니 속에 뭔가가 들었는지 달그락 소리가 났다. 수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봉투를 꼭 쥐고, 주위 시선에서 도망치듯이 조금 떨어진 가게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문제는 이 수수께끼의 봉투다. 일단 위험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속에 종이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일단 그걸 꺼내 봤다. 접힌 메모 용지처럼 보이는 거기에 적힌, 단 한 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신을 만나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너무나 짧은 편지를 쥐었다. 글자 모양이 조금 흐트러졌지만 잘못 볼 리가 없다. 이건 치하야 짱 글씨다. 언제, 왜 이런 걸.
조금 생각한 끝에 '언제'의 답은 짐작이 갔다. 이건 그 할로윈 날 밤――우리들이 결별하기 조금 전, 내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가 가방에 몰래 넣어뒀을 것이다. 내가 돌아왔을 때 당황하면서 다시 앉았던 치하야 짱. 누가 속을 뒤졌던 것처럼 가방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핸드폰. 그런, 거였구나. 하지만 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날 밤 일.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사고를 멈출 수는 없었다. 입구에 손을 대고 봉투를 뒤집자, 그것을 부채질하듯이 키홀더가 하나 손바닥 안에 굴러 떨어졌다.
그 장식, 작은 크리스탈에 갇힌 것은 주걱 같은 몸통에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한 캐릭터. 이 녀석은 본 적이 있다. 여름이 끝날 즈음, 치하야 짱과 여행을 갔던 여관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내가 "귀여워"라고 했고, 그녀가 "어디가?"라고 평했던 지방 마스코트 캐릭터.
링을 잡고 조명에 비추어 보니, 그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하고. 거기엔 즐거웠을 추억이 갇혀 있었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 하지만 결코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던 치하야 짱과의 추억.
신발 옆에 툭 물방울이 떨어져서,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기엔 비가 안 올 텐데.
톡 하고, 하나 더. 멈추지 않았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흘러넘치는 기억이, 감정이, 유일한 출구를 찾은 것처럼 눈에서 흘렀다.
"왜, 치하야, 짱."
결국 입에서도 흐르기 시작했다.
즐거웠는데, 분명히.
어느새, 어째서, 치하야 짱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은 걸까.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번져 가는 시야 너머에서 크리스탈이 은은한 조명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어렴풋했던 사고가 결국 '그것'에 도달했다.
그렇, 구나.
치하야 짱도, 똑같았던, 거구나.
분명 나와 만난 걸, 함께했던 시간을, 정말로 소중히 생각해 줬던 거다. 여행을 갔던 추억도, 반짝이는 유리 속에 넣어 두듯이, 소중히. 하지만 거기엔 절대로 손을 대지 않도록.
이젠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몇 개의 소중한 것들이, 기쁨과 슬픔과 함께 몸 전체를 휘저었다.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저 멈추질 않았다.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키홀더를 움켜쥐고 가슴에 댔다.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아픈 기억에 손을 뻗는다. 치하야 짱의 마음을 바라본다.
‘좋아해, 하루카.’
마지막에 치하야 짱과 얘기를 했던 밤. 우리들 관계의 토대를 무너뜨린 말.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너무도 강한 마음이 담겨 있었던, 단 한 마디.
거짓말도, 장식도. 허세도, 수치도 없는. 틀림없이 치하야 짱의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을 밝혀 주었다. 이제 와서 그 말의 진의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치하야 짱은 정말로 나를 소중히 생각해 주었다. 지금까지 관계를 망가뜨려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해, 주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내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행복을, 내가 바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어.’
내게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끝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그 사랑이 날 향한 것이었다면.
치하야 짱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여자를 사랑하게 된 자신으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치하야 짱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행복은, 좋아하고, 사귀고, 스킨십을 하고. 더 가까워져서, 결혼하고, 가정을 만들고. 그런.
분명 전부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둘 다 여자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란 벽이고. 누군가의 마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무척, 무척 멋대로 추측하는 거지만. 치하야 짱은 그런 의미로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도. 그래서 처음부터 가까워지려는 게 아닌 고백을, 내게 했다. 이 이상 아무도 상처받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과 내가 행복해지는 것을, 그녀는 진심으로 바랄 수가 없었다.
……그런 건.
그런 건 당연하잖아.
나도 알아. 경멸할 리가 없잖아. 사랑이란 그런 거지?
‘친구조차, 아니야.’
날 찢어 놓듯이 관통한 총알 같은 말.
그래도 치하야 짱은 내 행복을 빌어 주려고 했다. 친구로서, 친구의 행복을. 그렇게 있을 수 있도록. 그게 올바른 '우리들'의 관계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그녀는 나와 계속 친구로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싫어진 건가 생각했다. 치하야 짱에게 달라붙는 내가, 방해가 된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어떤 의미로 아주 조금은 맞았다. 내 멋대로인 악의 없는 호의는, 계속해서 옆에 있던 그녀를 상처입혔다.
늘 내가 치하야 짱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좋아하는 감정과 마주봤던 건 치하야 짱이었다.
그녀가 나와 친구로 지낼 수 없었던 건.
나와 있으면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으니까.
분명 그건 결별의 인사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진짜 친구가 되기 위한, 필사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으, 아……. 으흑, 으――"
꼭 죄어진 목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래선 내가 친구로서 실격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치하야 짱은 그런 마음을 품고, 그래도 나 같은 애 옆에 있어 주었을까.
둘이서 여행을 갔던 여름의 끝?
분명 키 홀더를 할로윈 날까지 전해주지 않았던 건, 그 날을 생각하고 미리 사 두었던 것이겠지. 생각해 보면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말을 꺼낸 것부터가 치하야 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나와 보낸 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봉해 두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름 축제에 치하야 짱을 불렀을 땐 이미 그랬을까?
그러고 보면 그날 밤 치하야 짱은 내게서 계속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그 날 일 때문에, 치하야 짱은 날 피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이미 치하야 짱이 내 곁에 있는 걸 괴로워했다면 전부 납득이 간다.
그럼 더 전, 여름이 시작될 즈음?
치하야 짱이 다시 노래를 잃을 뻔 했을 때. 아무것도 내겐 상담해 주지 않아서. 하지만 갑자기 날 불러냈나 싶더니, 흠뻑 젖어서 뛰어와선 내게 라이브 티켓을 건네주고. 이런 걸 생각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치하야 짱에게 실례가 될까. 그 라이브에서, 사랑 노래는 나만을 위한 게 아닐까 생각한 건 오만일까.
……아니.
분명 치하야 짱의 마음에서 계속 눈을 돌려온 게 훨씬, 훨씬 심한 짓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계속.
이런 건 조금만 생각하면 더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걸 계속 피해 왔던 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든다. 조금 떨어진 빌딩의 커다란 디스플레이에, 미국에서 대인기인 아이돌이 비치고 있다. 선전하고 있는 새 CD는 일본에서도 발표가 결정된 물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었다. 아이돌이 되는 건 내 꿈이었다.
사무소에 들어오고 나서. 그야 안 팔리는 시기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두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사소한 활동도, 하루 종일 레슨만 하는 날도 충실한 날이었다.
점점 큰 무대에서 라이브를 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알아주고. 가슴을 펴고 아이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
내 꿈은 이루어졌다.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분명 나는, '지금'을 지키는 데에 너무 필사적이 되었던 거다.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정말 조금이라도 망가뜨릴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꿈꾸는 게, 무서웠다.
다른 친구들은 '아이돌이 되는 것' 자체엔 그리 강한 집착을 품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좋은지 나쁜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예를 들어서 치하야 짱은 노래를 진지하게 추구하고. 마코토는 귀여워지고 싶다든가, 유키호는 약한 자신을 바꾸고 싶다든가 그런. 분명 다들 각각 다른 생각을 가슴에 품고, 아이돌이란 길을 골라서 무언가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나, 는.
나도 물론 더 큰 스테이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런 바람은 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주변이 바뀌어 가면서까지 원하는 일인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난 지금이 좋다. 친구들과 아이돌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러니까 두 번째 올스타 라이브 때, 모두가 흩어져 버리는 게 너무도 싫었다. 필사적으로 이어 두려고 했다. 내 '모두 함께 즐겁게'는 다른 애들에게 폐가 되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레나 라이브를 앞두고 합숙했을 때, 프로듀서님이 해외로 가는 걸 말했을 때도 그렇다. 프로듀서님은 미래를 보고 결단했는데, 난 불안과 쓸쓸함에만 사로잡혀서.
지금도 이렇게 할리우드에 와 있는 게 정말 옳은 것인지, 마음 어딘가에선 생각하고 있고. 다른 친구들과 치하야 짱과 떨어져서까지 걷고 있는 이 길은, 내가 바란 게 맞는 건지 생각하고. 그 끝에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무섭고, 눈을 돌리고.
……그렇다. 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지금이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을 보는 것이 두렵다.
치하야 짱과의 관계도 그렇다.
치하야 짱과 같이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아서. 이대로 계속 친구로 있었으면 하고.
괜찮잖아, 그 앞일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치하야 짱이 그런 말을 하니까.
친구로 있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고 말해 주니까.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눈을 돌리고, 그 대상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 어린애처럼 울고 있다.
너무나 어리석었다. 내년 크리스마스도 같이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니. 그런 어린애 같은 순진하고 자기 멋대로인 '다음'을 기대하면서 치하야 짱에게 떠넘기기만 했던 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눈 깜짝할 새에 가을도 끝나고. 막연한 소원만을 의지하며 맞은 겨울은, 이제 1년 전과는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바보 같아. 바보야. 이게 사람 마음도 자기 마음조차도 몰랐던 바보 같은 내 죄다.
하지만 즐거웠다. 행복했다. 난 치하야 짱과 친구가 되어서.
언젠가 치하야 짱이 다시 한 번 나와 친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 줄 때, 다시 만나면 된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면서 괴로운 것도 웃어넘길 수 있게 되면. 일부러 그 이상을 바랄 필요도 없다.
――정말로?
정말, 이야.
한 순간 머리를 처드는 뱀처럼 떠오른 생각을 필사적으로 다시 한 번 집어 넣는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꽁꽁 덮어 둔다.
그치만.
치하야 짱이, 날 생각해서 내 준 답이라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나 같은 걸 위해서, 분명 마음이 엉망이 되도록 찾고 바라 준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그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 와서 뭘 발견하고, 뭘 말할 수 있을까.
"으, 윽, 아……극,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젠 부끄러움도 체면도 뭣도 없었다. 어차피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서 지나다니는 사람들 시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신을 만나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치하야 짱이 마지막에 내딛어 준 온 힘을 다한 한 걸음이, 바다도 시간도 뛰어넘어 도착하고 말았으니까. 정말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이, 내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부드럽고 애절하게 꼭 조였다.
한 줄 뿐인 편지와 작은 선물을 움켜쥐고, 감정이 솟아오르는 대로 엉엉 울었다. 여기서 전부 내보내 버리자.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감정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깎여서 작아지도록. 둥실 떠올라서 내게서 멀어지도록.
하늘을 넘어서 전해진 마음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내 이 마음도 하늘에게 되돌려 주자.
멀리 떨어진 너에게 닿도록.
치하야 짱을 향한 좋아함. 치하야 짱이 내게 속삭여 준 의미의 좋아함. 그게 만약 내 안에 있다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어쩐지 그런 게 아니다. 나 자신의 의지로 도망치지 않고, 눈을 돌리지 않고, 대신 없었던 일로 한다.
만약 이게 우리들의 사랑이라면.
부탁이야, 치하야 짱.
나도 네 행복을 빌게 해 줘.
누구보다도 소중한 네가.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안녕.
"아니야, 하루카!"
오늘도 하루 종일 이어진 촬영을 끝내고, 촬영장을 뒤로한 내 등에 미키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걸음을 늦추어서 그녀의 발소리가 옆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아니라니, 뭐가?"
"나도 모르겠지만!"
뭐야 그게, 하고 쓴웃음을 지어도 미키의 엄한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뭔가를 화내고 있는 것처럼. 뭔가가 답답한 것처럼. 우산을 안 든 쪽 손으로 주먹을 쥔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삐친 머리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미키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좀 더 말을 안 듣는다.
"오늘 연기는 감독님도 오케이 해 주셨잖아. 나, 열심히 했어."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
미키가 입을 꼭 다문 채로 옆에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둘의 우산이 부딪혀서 물방울이 튀었다.
"그런 건 노조미의 '안녕.'이 아니야."
"――윽."
어제 길가에서 펑펑 울었을 때 기억이 되살아난다. 놀란 게 들키지 않도록 우산을 빙글 돌려서 그 그림자로 옆얼굴을 감추었다.
"그거면 됐을 거야."
"안 됐어. 그건 분명 노조미가 아니야."
"……그럼 누구란 거야. ――나, 라든지?"
미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우산을 들고 머뭇거리면서 물었더니, 그녀는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하루카도 아니야."
안심한 것 같으면서도. 하지만 석연치 않은 마음이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 미키는 내 연기 어디가 아니라고 하는 걸까.
"미안, 미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좀 모르겠어. 나 그렇게 잘 하질 못하니까, 이번엔 '노조미'랑 '하루카'를 하는 것만으로 벅차."
다른 사람을 연기할 여유는 없어, 그렇게 농담스럽게 말하고 어제부터 끊이지 않고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회색 구름이 무겁다.
"있잖아."
미키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하루카는 지금 누구야?"
내 발이 멈추고, 다른 발소리 하나도 끊겼다. 우산이 비를 튕기는 소리만이 묘하게 크게 들렸다.
"사람 이름을 불러 놓고,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그치만 하루카 이상하잖아. 지금 하루카는 정말로 미키가 아는 하루카야?"
"……아마미 하루카, 열일곱살. 취미는 과자 만들기. 여고생이고, 아이돌 하고 있어요."
"그런 건 미키도 알아."
"그럼 됐잖아."
"흐응."
미키가 재미 없다는 듯이 우산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리면서 내 앞으로 돌아서 왔다. 주먹을 쥔 손을 내 입가에 슥 가져가 댔다.
"뭐, 뭐야……?"
"아마미 상, 열일곱 살이란 건 정말입니까?"
아무래도 인터뷰를 하는 기자 흉내인 것 같다. 왜 그런 걸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얘기를 돌릴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걸으면서 적당히 대답해 본다.
"여자는 언제까지나 열일곱 살이에요."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자에게 나이는 그냥 장식이라는 말이에요."
"그럼 역시 미키도 결혼할 수 있겠다, 아핫."
"잠깐만,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벌써 질렸어?"
"아~, 엇흠. 취미는 과자 만들기라고 하셨는데요, 특히 잘 하는 게 있습니까?"
"어…, 뭐든지 일단은 만들 수 있는데……. 만들 기회가 많은 건 쿠키겠네요. 한 번에 많이 만들 수도 있고, 녹지 않으니까 나눠 주기도 쉽고."
"그렇군요. 슬슬 오랜만에 하루카의 수제 케이크를 먹고 싶단 얘기가 들립니다만."
"미키, 일본에 돌아가고 나서."
"칫."
"꽤 잘 질리는구나, 미키는."
"으엇흠. 여고생이면 여러 고민이 있을 때 아닌가요?"
"전 그다지 학교 안 가거든요."
"하지만 어느 정도 귀여운 것 같고, 솔직히 고백 같은 거 받지 않나요?"
"어느 정도란 말,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얼굴 마주보고 들으면 짜증이 올라오는데."
"같은 사무소의 호시이 미키 상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잖습니까."
"싸움 거는 거지?"
"누, 눈이 진지해, 하루카 무서워, 농담이야!"
"아~ 네, 네."
"으음, 뭐더라――그래,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나요?"
"가십을 찾는 기자였나."
"없나요?"
"……없어. 쓸쓸한 고교생활이니까."
"……흐응."
"이번엔 정말 끝이야?"
"으응. 하나 더. 있잖아, 하루카는 왜 아이돌이 되기로 했어?"
"그야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게 좋았으니까. 동경했으니까. ……그런데 미키, 완전히 말투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그럼 왜 하루카는 지금도 아이돌을 하는 거야?"
"물론 그게 재밌으니까――"
"거짓말쟁이."
"어?"
미키가 마이크 흉내를 내던 팔을 내리고 갑자기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다.
"하루카, 지금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아."
"……그럴 리가 없잖아."
"필사적으로 스스로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미키는 알아. 미키가 지금 하루카랑 일하면서 전혀 재밌지가 않은 걸."
"다 아는 것처럼 멋대로 말하지 마."
"몰라. 모르니까 묻고 있잖아. 있지, 하루카. 날 봐."
"보고, 있어."
"으응. 하루카는 아무것도 안 보고 있어. 미키도, 하루카 자신도."
"……시끄러."
"시끄러운 줄 알면서 한 번 더 묻겠는데. 하루카는 왜 지금도 아이돌을 하는 거야?"
"그건 내가 아이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는 거야? 같이 영화를 찍는 데 방해가 된다고?"
"그런지도."
"역시 미키, 싸움 거는 거지?"
"그런지도."
차도를 달리는 차가 발을 멈춘 우리들 옆을 눈 깜짝할 새에 스쳐 지나간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미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나도 여러 가지 생각했어."
"그 결과가 오늘 그거야?"
미키는 피식 웃었다. 머리에 피가 확 올라서 달려들고 싶어지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윽! 미키는 좋겠네,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만큼 하고!"
"그거면 됐잖아. 하루카도 그렇게 하면 좋을 텐데."
"하고 있어! 열심히 하고 있어! 어차피 나는 열심히 안 해도 되는 미키랑은 다르니까!"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냥 하루카는, 정말로 겁이 많을 뿐이야.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분노와 굴욕에 입술이 떨렸다. 미키는 이제 웃고 있지조차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전부 솔직히 말할게. 지금 하루카를 보면 정말 짜증이 나."
조용히 말하는 미키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늘 하루카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 지금 하루카한테 그런 가치는 없어. 흥미 없어. 미키를 안 보는 하루카는 이제 이쪽에서 안중에 없어."
"미, 키……?"
"솔직히 말해서, 폐가 된다구. 엉터리 연기 밖에 못 하는 '아마미 하루카'는, 이 이상 미키랑 딴 사람들 방해좀 안 했으면 좋겠어."
"뭣――"
미키가 빙글 돌아서 멀어져 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론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받아칠 수가 없다.
뭘 입에 담든. 미키에게, 자신에게 변명을 쌓아갈 뿐이란 걸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던 미키는 "아, 맞다."하고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가방을 열고 내 눈 앞까지 돌아와서, 꺼내든 한 장의 종이를 떠넘기듯이 건네주었다.
이건, 티켓? 비행기 티켓?
받아든 내가 영문을 몰라서 눈을 깜빡이고 있자 미키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좀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손 안의 티켓에 시선을 떨어뜨린다. 12월 23일 14시 20분 로스앤젤레스 발, 일본행. 내일, 이다.
"뭐야, 이게……."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미키는 내게 등을 돌렸다.
"그럼――바이바이."
젖은 길을 찰박거리며 황록색 우산이 멀어져 갔다.
손 안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이 부스럭 구겨졌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서.
미키는 분명히, 꽤 전부터 날 포기했던 것이다. ‘지금’에 필사적으로 머무르려고 제자리걸음밖에 하려고 하지 않았던 날.
역시 나는.
아무것도 눈치 채질 못했구나.
어느새인가 기울어진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비참한 내 뺨을 적셨다.
눈이 내리지 않는 이 거리에.
비는 아직 그칠 것 같지 않다.
………
……
…
어제 미키가 한 말은 생각보다 훨씬 큰 대미지를 내게 입힌 것 같았다.
알람 소리에 눈이 뜨였을 때, 온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키와 만나는 것을 몸과 마음이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꽁꽁 묶인 것처럼 무겁고 뻑뻑한 손끝이 겨우 움직였을 때, 이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팔만 이불 밖으로 뻗어서 베개 맡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꺼내,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쉴게요'하고 연락을 했다. 원래 반 휴일일 예정이었고 그다지 영향은 없지 않을까. 푹 쉬렴. 그렇게 통역 담당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가. 요즘엔 그날 그날을 어떻게든 넘기는 게 고작이라서, 그다지 다음날 이후 일정을 확인 안 하는 버릇이 들고 말았다.
그래도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낮을 보내도 아무한테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야 그런가. 난 학생이지만 그 나름대로 돈을 받고 일을 하는 몸이다. 꾀병을 부려도 사회인인 내게, 일로밖에 관계가 없는 내게, 일부러 시간과 노력을 들여 화를 내 줄 사람은 없다. 그저 황당해 할 뿐이다. 못 써먹겠다는 인식만 하고, 필요 없다면 잘라낼 뿐이다. 어제 미키가 마지막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지만 미키는.
계속 마주봐 주었다. 걱정해 주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화를 내 주었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필사적으로 발을 들이밀려는 그녀에게서 도망친 건 나다. 같이, 모두 함께 같은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고 결정적인 데서 거리를 두는 건 늘 내 쪽이다.
프로듀서님이 날 감싸고 구멍에 빠지고, 라이브 연습도 생각처럼 안 되고. 그 때도, 레슨도 일도 던져두고 멋대로 혼자서 고민했었다. 또 겨울에 이 꼴이다. 난 앞으로 몇 번 이런 걸 반복하게 될까. 아이돌을 계속하는 동안, 계속……?
이 3일간 그치지 않는 빗소리가 성가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도록. 들어오지 않도록.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 거린다.
치하야 짱의 마음에서 눈을 돌리고. 프로듀서님한테도 얼버무리고. 미키에게서도 도망쳤다.
혼자뿐이고, 스스로를 잘 알 수가 없어서.
아마미 하루카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바란 내 지금은, 사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이젠 뭐가 됐든 내가 생각해도 의미 없는 것뿐일까. 전부 다, 이젠 어찌할 수 없는 데까지 와 버린 걸까. 감독님도 날 포기해 버렸을까.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어제보다 강한 비가 발코니를 계속 두드렸다.
정말, 시끄럽구만.
난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은데. 보고 싶지 않은데.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부탁이니까, 나 같은 건――
빗소리보다 높은 전자음이 낮인데도 어두운 방 안에 울렸다.
무시한다.
멈추지 않는다.
이불에서 머리를 내밀자 핸드폰이 빛과 소리로 전화가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시끄러.
이윽고 힘이 다 떨어진 것처럼 부재중 전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 마디 메시지를 녹음하기 전에 뚝 끊기고, 다시 전화벨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핸드폰을 들고 슬쩍 발신인을 확인하니, 프로듀서님이었다.
무슨, 일일까. 미키가 뭔가 내 얘기를 한 걸까.
이대로 전화를 안 받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 기세라면 내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터치스크린을 조작해서 머뭇거리면서 귀에 댔다.
『――하루카니!?』
거의 비명에 가까운 프로듀서님 목소리가 내 고막을 때렸다. 소리뿐인데 굉장한 박력에 놀라서 어깨가 움찔했다.
"어, 그게, 하루카에요. 아마도."
꼼지락거리며 이불에서 나와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프로듀서님 치곤 거친 호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하루카, 진정하고 들어.』
"네?"
『일하러 이동 중에, 치하야가 사고를 당했어.』
"응?"
별로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다.
"저, 죄송한데요,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치하야가 차에 치여서 중태야. 의식이 돌아오질 않아.』
"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위험한 상태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각오는 해 뒀으면 해.』
"왜, 그,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바쁜데 정말 미안하다. 네게 얘기를 할까 어쩔까 고민했는데――하루카는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멋대로 판단한 거야.』
조금씩 진정을 되찾아 가는 프로듀서님의 말은 역시 잘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지금은 오토나시 상이 붙어 있어. 내가 다쳐서 신세를 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그 병원에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지금부터 갈 거니까, 또 상황이 변하면 연락할게.』
있잖아.
『――하루카?』
뭐야.
힘 없이 떨어진 팔이 침대 위에 툭 떨어졌다.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통화를 끊었다.
빗소리만이 끊임없이 조용한 방에 울리고 있다.
……정말로.
너무 멋대로 구는 거 아니야, 치하야 짱.
나한테 좋아한다고 그래 놓고.
나한테 잘 가라고 그러고.
이번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로 가 버릴지도 모른대.
적당히 좀 해.
이제,
――나도 몰라.
치하야 짱이 그렇게 자기 멋대로 군다면.
나는.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진짜!!!!!!!!"
나도 내 멋대로 굴 거야!
빗소리를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까지 닿지 않을까 싶은 소리를 지르고 일어섰다. 미키 반대편 이웃 분, 방에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쓰레기통에 던져두었던 구깃구깃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손에 든다. 시계를 본다. 그 근처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으면 공항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안 늦는다.
지갑과 여권을 가방에 쑤셔 넣고 세수도 하지 않고 옷만 갈아입은 채로 신발에 양 다리를 집어넣었다. 빨간 우산을 들고 문을 벌컥 연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알 바 아니다.
뭐가 "잘 가."냐. 치하야 짱은 엄청 바보다.
멋대로 날 좋아한다고 하고. 멋대로 내 행복을 정하고.
이젠 눈을 돌릴 수 없다.
내 사랑은.
치하야 짱과 다르지 않다.
내 행복은.
치하야 짱 없이는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로 돌진해서 1층까지 내려왔다. 현관을 뛰어나가는 나를 보고 카운터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이상하려나, 지금 나는.
이상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돼.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난 날 위해 사는 거니까.
머리 위로 든 우산에 비가 투둑 떨어졌다. 이런 날씨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 그건 간단한 얘기다. 여기서 떠나면 된다. 국경 그 너머라고 해도.
치하야 짱이 있는 곳에 내가 간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다쳤다는 치하야 짱이 낫는 데엔 내가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다.
그래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날 봤으면 한다.
손을 잡을 수 있는 곳까지. 말을 나눌 수 있는 거리까지 가자.
있는 힘껏 땅을 찬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향해.
결국 난 깨닫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깨닫고 말았다.
치하야 짱이 없는 내일. 진짜 정말로, 모든 것이 늦어 버린 미래. 아주 잠깐 머리를 스친 그 풍경은 절대로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역시 무서워. 미래를 그린다는 건. 언제 주변이, 나 자신조차 바뀌어 버릴지 모르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원하지도 않고, 미래에서 후회할지도 모르는 자신이 훨씬 더 싫다는 걸 깨닫고 말았으니까.
있지, 치하야 짱.
미안해. 역시 나도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널 좋아해.
네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발렌타인 초콜릿을 만드는 생각을 했을 땐, 뭔가 싫다는 기분이 들었어.
내 생일에 너희 집 열쇠를 받았을 땐, 매일같이 여기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하고 말야. 막연히 상상한 함께 지내는 시간들.
그래도 만나고 싶으니 만나러 간다는 건 역시 좀 아닌가 고민하기도 하고. 딱히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이유로 너희 집에 가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널 불러냈을 때 내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르지. 조금이라도 귀엽게 보이고 싶어서. 난 지금이라면 알아, 그 날 네가 나한테 차갑게 대했던 이유. 그 괴로움을, 상냥함을 깨닫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난 그날 밤, 아무리 아프더라도, 괴롭더라도, 네 곁에 있고 싶다고 분명히 바랐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그 할로윈날 밤도.
한동안 못 만나게 될 나를 조금이라도 네 특별한 곳에 두고 싶어서. 그 이상으로, 그저 만나고 싶어서. 장난치면서 꼭 끌어안고.
그 순간에 말이야, 이런 말 얼굴 보고는 못 하지만.
나, 입술로 치하야 짱을 느껴 보고 싶다고, 분명히 생각했어.
볼에 갖다 대면 어떨까, 그래도 역시 입술이 좋은데, 하고.
좀 더 가까이 널 갖고 싶어서. 내 전부로 널 끌어안고 싶어서. 네 전부를 새겨 줬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하고.
그런 것들 전부가 다른 거라고 생각했어. 이건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단지 좀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킨 척을 하면서, 진짜 마음에서 계속 눈을 돌리고.
하지만 그것도 끝이야.
이젠 무리야.
누가 아니라고 해도. 네가 그만한다고 해도.
이게 내 사랑이야.
아직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어.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끝나지도 않았을 거야.
모든 것을 치하야 짱에게 털어놓고 나면, 이번에야말로 지금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됐다. 내가 바라는 건 그 너머에 밖에 없으니까.
‘하루카, 미래는 지금의 연장선이야. 그러니 지금을 소중히 하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아레나 라이브 합숙날 밤, 프로듀서님이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지금은 안다. 그 말의 진짜 무게, 미래를 보는 것의 귀중함, 그리고 그걸 목표로 하는 내가 정말로 걸어야 할 길.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더 빨리.
치하야 짱의 포기도.
내가 멋대로 그었던 한계선도.
필요하다면 상식이든 뭐든.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게.
어찌해도 없어지거나 하지 않았던 이 마음도, 나 전부를, 저 하늘로.
그저,
네가 있는 곳으로.
………
……
…
"여기면 됐어요!"
기세 좋게 일어나다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하는 소리와 내 목소리에 놀라서, 브레이크를 밟던 택시 기사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파라.
뒷좌석에서 요금 미터를 확인한다. 으아, 다섯 자리?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랜만에 일본 지폐 몇 장을 건네고, 아픈 머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차 밖으로 나왔다.
……춥다. 저쪽이랑은 전혀 다르다.
입가까지 두르고 싶은 걸 참으면서 목도리를 목에 다시 감았다. 조금 더 뛰어야 하니 산소가 부족해지는 건 싫다.
준비를 마치고 발을 내딛으려다, 무언가 생각났다. 우산을 택시 안에 놓고 와 버렸다. 이미 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뭐 됐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옆에서 봐도 바다를 건너 왔다곤 생각하지 못할 작은 가방 하나를 덜렁거리면서 병원의 넓은 부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화로 프로듀서님이 입원했던 데라고 했으니까 여기가 맞을 거다. 문제는 병실. 혹시 아직 집중치료실일까. 그 뒤로 프로듀서님한테 연락도 없었고, 지금 전화해서 묻는 것보다 접수대에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지.
그나저나. 수백 대는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뛰어가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병원 입구 부근이 전부, 꽤나 반짝거리고 있다. 정면에 하늘을 뚫을 것처럼 서 있는 건, 크리스마스 트리? 별로 큰 병원에 올 기회가 없어서 그게 드문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명 장식이 돼 있는 것 같다. 더욱 스피드를 올리면서 빛나는 이세계로 뛰어들어 본다.
조명이 비춰진 나무 사이, 순록, 눈사람 같은 것들 옆을 뛰어간다. 반나절동안 비행으로 한숨도 못 잔 머리가 흔들려서 울린다. 비일상적인 빛에 둘러싸여서 꼭 꿈속에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결국 환각이라도 보게 된 건가 생각했다. 계속 생각했던 사람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만 같은.
일제히 여러 색의 빛을 발하는 크리스마스 심볼. 트리 밑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긴 머리를 등까지 늘어뜨린 연약한 실루엣이 하나.
내가 바라는 사람을 멋대로 그 뒷모습에 덧씌운 걸 죄송히 생각하면서, 그녀와 트리를 돌아 병원 입구로 가려다.
열 걸음정도 거리를 두고 내 발이 멈추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거친 숨을 고른다.
심장이 격렬한 고동을 계속 만들어 내는 건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 2개월 못 만난 정도로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훨씬 더 긴 시간동안 같이 있었고,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그녀는 내 마음 한 가운데에 있었으니까.
"치하야, 짱……?"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상한 곳이 없는 깨끗한 머리카락이 바람을 받아 휘날렸다.
"하루, 카――? 왜……."
돌아본 그녀의 눈이 나를 정면으로 보고 크게 뜨였다.
음, 어디 보자.
……꿈이었단 결말?
사실 현실의 나는 아직 비행기 속에 있고,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든가 그런.
그것 치고는 몸이 아플 정도로 춥단 말이지. 치하야 짱이 양 팔로 감싸 주면 그것도 바뀔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해도.
그걸 인정하고 멍하니 서있기 위해 난 여기 있는 게 아니다.
한 걸음을 내딛었다.
"치하야 짱은 왜 여기 있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조금 전에 일이 끝나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굉장한 속도로 차가 달려와서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더니 갑자기 급정차해서, 안에서 아미와 마미가 나와서, 영문도 모른 채 뒷좌석으로 끌려갔어. 리츠코도 운전 좀 살살 하지. 수명이 줄어든 것만 같아."
"――뭐야, 그게."
치하야 짱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더니,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 눈동자엔 당황의 빛만이 어려 있어서, 얘길 들어도 나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마미가 이제부터 유키호 생일 파티를 할 거고 트리 밑에서 집합이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안 오고. 리츠코랑 애들은 나머지 멤버를 데리러 가서 안 돌아와."
"응?"
치하야 짱이 사고를 당했단 전화가 온 건 한참 전이다. 뭔가 큰 음모에 말려든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하루카는 아직 할리우드에 있던 거 아니었어? 누군가한테 불려온 거야?"
"난 있지, 지금은 치하야 짱 얘기보다도 영문을 모르겠는데……치하야 짱이 차에 치였대서."
"뭐? "
놀랐는지 치하야 짱이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곧 불편하단 듯이 눈이 흔들리고, 또 내게서 멀어졌다.
"오늘, 어라, 벌써 어제인가? 프로듀서님한테 전화가 왔거든. 치하야 짱이 사고를 당해서 눈을 뜨질 않는다고 그랬는데. 으음, 건강해?"
"미안하지만 난 보는 것처럼, 그런 일은 안 당했는데――"
설마. 멍하니 치하야 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유감스럽게도 난 머릿속이 엉망이라서,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치하야 짱'말고 다른 걸 생각할 자리가 없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그건 아무래도 좋다. 눈앞에 치하야 짱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난 전해야만 할 것이 있다.
"저기, 치하야 짱."
한 발 더 내딛었다. 치하야 짱이 겁먹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좁혀진 만큼 거리를 벌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나와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는 치하야 짱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알아?"
"프로듀서한테 속아서, 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냐. 바로 요 전까지 치하야 짱에게서 도망쳤던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러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 결심했어. 진짜 마음에서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그 마음을 위해서라면 뭐가 됐든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무슨 말이야?"
"여러 가지, 정말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먼저, 사과하게 해 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단번에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치하야 짱. 계속, 계속 상처입혀서. 깨닫지 못해서. 알려고도 안 했어. 내가 상처 입는 게 무서워서……"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들자, 치하야 짱은 황당하다는 것처럼 날 보고 있었다. 그 입술이 여러 번 주저하다가 열렸다.
"그날 밤 얘기라면, 사과해야 할 건 나야. 중요한 여행 전날에 그런 얘기해서 미안해. 곤란했었지? ……싫었, 겠지."
"확실히 여러 가지로 고민하기도 했어. 그치만 있지, 전혀 싫지 않았어. 치하야 짱이 좋아한다고 해 준 거. 그렇게나 날 생각해 준 거. ……기뻤어."
"어……?"
"그러니까 두 번째로는, 고마워. 나 같은 사람의 행복을 빌어 줘서."
치하야 짱이 무언가를 결심하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각오를 굳힌다.
지금이라면 서로 응어리가 어느 정도 작아진 상태로 다시 한 번 이별할 수 있다. 서로의 아픔을 안고, 서로 다른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지, 아니야."
그래도. 어쩌면 내가, 치하야 짱이, 더 상처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걸 선택했고, 여기에 있다. 그걸 선택받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치하야 짱은 몰라. 내가 원했던 행복의 모습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미안해, 치하야 짱. 나한텐 이런 말 할 자격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이번엔 먼저 사과해 둘게."
상처 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명 난 소중히 대하려던 팔로, 앞으로도 몇 번이나 치하야 짱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똑같이 치하야 짱에게 계속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굉장히 심한 말을 할 거야. 제멋대로고, 거만하고, 잔혹한 말."
"하루카……?"
하지만 그게 내가 바라는 미래니까. 둘이서 걷고 싶은 길이니까.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옆에 계속 있겠다는 의미니까.
당연 것을 바라지 못하고. 아무리 서로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이상의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 이상의 행복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치하야 짱. 나도 너와는, 이제 친구로 못 지낼 것 같아."
"그건 진작에 끝난 얘기잖아? 애초에 내 바람이기도 했고. 일부러 내 죄책감을 덜어 주려고 안 해도 돼."
치하야 짱이 쓸쓸히 웃었다. 이별을 고했던 날 밤과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말야, 아니라구. 내가 보고 싶은 건 그런 웃음이 아니야.
치하야 짱이 웃었으면 좋겠어. 행복하게, 기쁘게.
내 옆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 있지, 멋대로긴 하지만 치하야 짱한테 화난 게 있어."
"나도 알아. 아까도 사과했잖아."
"아니라니까. 내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말야, 치하야 짱, 뭔가 포기하고 있었지."
"알고, 있었어?……하지만 당연하잖아. 뭔가를 바랄 수 있을 만한, 깨끗한 감정이 아니니까."
"으응. 치하야 짱은 포기하면서,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바라고 있었어. 나한텐 그게, 빨리 빨리 판결을 내려달라고, 날 편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 그럴 리가……."
"그때 나는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있지, 사실은 싫었어. 슬펐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아무것도 생각하려고 안 했으니까. 멈춘 생각을 다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따랐다. 치하야 짱의 '좋아해."에 대답할 만큼의 "좋아해."를,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 걸 말할 자격 따위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생각했어. 필사적으로, 정직하게. 치하야 짱의 마음, 내 마음. 내 바람, 치하야 짱이 발견해 준 것과는 다른 길과 그 끝을."
내 바람은.
"난 말야, 치하야 짱이 날 원했으면 했어."
치하야 짱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괴롭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루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서 말하는 거야?"
"응."
"충분히 힘들었는데, 더 괴로워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거야?"
"응."
"나보고 더 상처입으란 거야!?"
"응. ……하지만 그건 치하야 짱만의 짐이 아냐. 나도 같이 짊어지고 싶어."
제멋대로고, 거만하고, 잔혹하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미래를 망가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부탁이야, 치하야 짱. 치하야 짱 전부로 날 원해 줘. 치하야 짱 전부를 내게 줘."
"잘도, 잘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치하야 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친다.
정말 그래.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단 건 알고 있어. 한 대 맞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이 거리에, 그 마음 끝에 있고 싶어. 그게 얼마나 아프더라도.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치하야 짱은 자기가 상처입기 싫으니까 떨어진 거였지. 내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헤어지자고 말해 줬던 거지."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왜 또 내 앞에 있는 건데!"
"내가 있고 싶어서."
"――윽."
치하야 짱이 숨을 삼켰다. 눈에 지금껏 본 적 없었을 정도로 슬픔이 어리고, 날 노려보았다.
"위로도, 동정도, 이제 와선 다 필요 없어. 내 마음을 받아들이고 같이 있든지, 그걸 부정하고 떠나가든지, 두 가지 밖에 없단 걸 알고 그렇게 결정한 거잖아? ――넌 너무, 착하니까."
"난 착하지 않아. 난 내 멋대로 행동할 뿐이야. 하지만 그런 안 좋은 부분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어. 가장 소중한 마음이었으니까."
……무서워라.
이렇게 치하야 짱을 상처 입히고.
이제 받아들여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우리들은 정말로 결정적인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하야 짱은.
그런 두려움을 계속 품고서도, 내게 전해 주었다. 진짜 마음을.
자신이 엉망이 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내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내가 내딛을 수 있는, 마지막 한 걸음을.
"치하야 짱이 보여 준 미래가 옳을 지도 모르지만. ……스스론 어떻게 못 할 정도로 있지."
미안해, 치하야 짱. 이젠 멈출 수 없어.
"나, 치하야 짱을 좋아해."
치하야 짱이 멍하니 날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이젠 친구라는 거리론 있을 수 없어. 물론 헤어지는 것도 싫어. 이 거리론, 만족 못 해."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이게 한계다. 하지만 전해지길.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이. 미래를 향한 기도가.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내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는 거였으니까. 그런 건 이미, 친구도 뭣도 아니었던 거야."
헤어진 날 밤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 얘기를 시작했을 때. 그게 나라고 말하기 전. 듣기 싫었다. 그런 사람, 알기 싫다고 생각해 버렸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너를, 나 말고 다른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너를 알게 되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있지. 나도 똑같았던 거야. ――으응. 깨닫고 나서도 계속 모른 척을 해 온 내가 훨씬 나쁘지.
"그런 나도 있지, 이젠 네 행복을 멀리 떨어져서 빌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나쁜,
"그리고 내 행복은, 너와 함께 있는 걸로밖엔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행복의 형태는.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게 해 줘. 내게만 널 계속 소중히 여기게 해 줘."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치하야 짱이 양 손을 입가로 가져가서.
"하루, 카는……. 하루카는, 치사해. 전부 다 헛수고가 됐어. 멋대로 그런 말 하고……."
"――미안해."
"그럼, 안 되는데. 그렇게 될 리가, 없는데. 네가 어디선가 웃어 준다면, 그거면 됐다고. 겨우 생각하게, 됐는데……."
"――정말로 미안해."
"맨날 내 마음 같은 건 뒷전이고……."
"그 때 기쁘게 생각했던 건, 지금 치하야 짱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제멋대로……지."
"……당연하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좋아하는걸, 하루카를. 지금까지 계속. 앞으로도, 어차피."
오열이 섞여서 잘 안 들렸지만. 어차피 라니 뭐야. 잘못 들은 거겠지.
"나도 정말 좋아해, 치하야 짱."
하지만 제대로 전해져 왔어. 고마워――
내게서 얼굴을 감추는 것처럼 딴 데를 보고.
입을 덮은 양 손에서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고.
눈도 뭔가 흘러나올 것 같아서 전혀 그럴 여유가 없는데.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려는 건 전해져 오지만, 유감스럽게도.
왜인지 내 눈엔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런 어쩔 수 없을 만큼 비뚤어진.
어쩔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옆얼굴에.
눈이, 마음이 이끌리는 건.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으……윽, 큿――"
한 걸음 떨어진 땅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우산은 필요 없겠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 발 밑까지 젖을 것 같았으니까.
남은 거리를 좁혀서, 꼭 끌어안고 싶어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역시 지금 내게 그럴 자격은 없다.
그 후 내가 대답을 기다릴 동안 계속.
내가 편지와 키홀더를 쥐고 있었을 때처럼, 치하야 짱은 소리를 높여서. 아무것도 속이려 하지 않고, 그저 계속 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두 눈에선 멈추지 않고 눈물이 흘러서.
치하야 짱이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지만.
내가 치하야 짱네 집을 뛰쳐나왔을 때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널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치하야 짱도,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혼자 울었던 적이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미안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분명히 기쁘다고 느낄 거란 건.
용서해 주는 걸까. 지금 치하야 짱은. 계속 상처를 줬던 나를.
받아들여 주는 걸까.
너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뛰어서 다가가고 싶어지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눌러서.
생각 밑바닥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에.
내 귀는,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몇 걸음 분의 발소리에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치하야 짱의 머리가, 툭. 내 가슴에 그 무게를 맡겼다.
평소엔 나보다 키가 큰 치하야 짱의 표정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하루카는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랬지."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할게."
"……하나 조건이 있어."
"말씀해 보시지요."
"나한테도, 하루카를 행복하게 만들게 해 줘."
"――전력을 다해서 행복해질게."
치하야 짱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 몸을, 드디어.
겨우, 끌어안았더니.
치하야 짱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내 양 팔에 달라붙었다.
따뜻해라.
도망치고, 멀어지고. 꽤나 긴 시간이 걸려 버렸지만.
겨우 도착한, 내가 바랐고 마지막엔 치하야 짱이 선택해 준 이게, 우리들의 거리다.
이제,
괜찮겠지.
안 참아도, 안 참게 해도, 괜찮겠지?
온 몸의 체중을 전부 내게 맡기고, 눈시울을 적신 채 올려다보는 치하야 짱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
생각을 못 하겠다.
내가 위쪽에서 할 기회가 더 적을 테고.
강한 힘에 이끌리듯이, 그 입술에, 내 입술이――
"미안 미안 미안 잠깐만 기다려! 그 이상은 나중에 해!"
닿으려던 참에, 너무도 조용했던 둘만 있었을 세계에 몇 개의 발소리와 함께 그 소리가 끼어들었다.
…………………….
야.
"히얏호~~~! 가라 가라, 해 버려, 하루룽~!!"
이쪽으로 달려오는 프로듀서님을 앞지르고 아미가 소리쳤다. 그 뒤로 왠지 본 적 있는 차 뒤편에서 많은 본 적 있는 얼굴들이.
있잖아.
찬물을 끼얹는다느니, 그런 미적지근한 표현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이건 얼음물을 끼얹은 꼴이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다.
당황스럽게 웃음 짓는 아즈사 상. 그리고 유난히 재밌어 보이는 히비키 짱. 짜증날 정도로 온화한 웃음을 띤, 그녀로선 드문 색 목도리를 두른 타카네 상.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인 마미. 왠지 조금 쓸쓸하게 우리들을 바라보는 유키호. 그 옆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코토. 입을 열고 멍하니 있는 야요이 눈을, 뒤에서 이오리가 화난 얼굴로 가리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는 건 리츠코 상.
이게 무슨 일이야. 전원 집합이다.
있잖아, 나 분명히, 다 같이 함께하는 거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굳이 지금. 이 장면에, 어쨌든 간에, 다들 필요 없었던 거 아냐?
제일 뒤에서 얼굴 정면에 들고 있었던 비디오카메라를 내리는 건――
어?
카메라!?
뭐 하는 거야, 저 새는!???
"미안해, 하루카, 치하야! 진짜 미안해, 설마 둘이 진짜로 이렇게까지 그렇고 저렇고 이랬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당황하면서 멈춰서 있는 프로듀서님. 폭발할 것 같은 분노의 날 끝을 어떻게든 봉우리 쪽을 향하면서, 그래도 역시 찌를 것처럼 노려본다.
"일단은……설명. 해 보시죠?"
히윽, 하고 유키호 같은 소리를 내면서 프로듀서님이 당황한다.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지만, 다들 딴 데를 보고 있다. 일치단결이란 뭐였는지.
"그러니까 있지……. 우리들 사이에서 너희들 상태가 이상하단 얘기가 나와서……. 일단 너희들이 제대로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그 기회를 어떻게든 만들어 봤는데……."
"그래서 저한테 치하야 짱이 사고를 당했단 거짓말을 했단 말이죠."
한숨을 쉬고 싶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화난 표정은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야 어지간한 이유로 치하야 짱을 만나러 바다를 건너오지는 않았겠지만 있지.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해도 되는 농담하고, 안 되는 농담이 있잖아요. 심장이 찌부러질 만큼 걱정했다구요. 왜 비행기는 이렇게 느린 걸까, 반나절이나 하늘 위에서 울 뻔 했다구요. 아무리 저라도 완전 화난 하루각하 인페르노라구요. "
이글이글 등 뒤에서 업화의 불꽃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모조리 공범자라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모두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그래서요, 우리들을 여기에서 만나게 해서, 뭐가 어디까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루카와 치하야가, 서로에게, 그, 연애 감정으로 고민하고 있단 건 오토나시 상이 짐작했었어. 물론 다른 이유도 몇 개 생각해 봤는데, 설마 여기까지 사태가 진행돼 있을 줄은 몰라서. 뭔가 오해가 있어서, 만약 이걸로 잘 해결되면 속였던 것도 유키호 생일 파티랑 크리스마스 파티로 떠들썩하게 흘려버리려고 생각했거든."
"잘 해결 안 됐을 땐요?""
"유키호 생일 파티랑 크리스마스 파티로, 떠들썩하게 전부 흘려버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똑같잖아요!?"
아, 정말.
모두들 다 어쩔 수가 없지만.
그래도 가장 어쩔 수가 없는 우리들을, 평소처럼 모두가 둘러싸고 있고.
아무리 그래도 전부 웃으면서 흘려버리기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어서 화가 났지만.
그 이상으로――
"하루카. 날 좀 풀어줄래?"
아.
지금까지 내 팔 안에서 계속 조용히 바닥을 보고 있던 치하야 짱이, 작지만 잘 들리는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모두의 고막과 심장을 떨리게 했다.
나 이상으로――
분노를 감춘 소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이건 아무리 나라도 어쩔 수가 없다. 치하야 짱은 엉망인 얼굴로 울던 모습을 모두에게 보인 셈이고.
나와는 정반대로 차가워서 동상을 입을 것만 같은 푸른 불꽃을 뿜어낸다.
"다들, 미안하지만 좀 앉아 줄래?"
"네."
치하야 짱 목소리에 모두의 대답이 깔끔히 나오고, 순서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 단결이란 굉장해.
"무슨 말인지는 알았어. 하지만 있지,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아서, 그――"
"죄송합니다!"
다시 겹쳐지는 하모니. 다행이다, 내가 이것저것 신경을 안 쓰더라도, 이제 분명히 765프로는 평안할 거다.
"어, 응……. 이제 됐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어이가 없단 듯이 한숨을 쉬고서 치하야 짱이 조금 미소 짓자, 겨우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아핫, 이거 무슨 촬영이야? 코토리, 카메라 안 돌리고 있어도 돼?"
거기에, 더 밝은 목소리가. 조명 빛을 받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날리며 걸어오는 건.
"자, 유키호. 생일 축하해인 거야. 선물을 고르다 보니까 오는 게 늦었어."
"고, 고마워, 미키 짱……."
무릎을 꿇은 채로 있는 유키호에게 봉지를 건네주고, 그녀는 똑바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다들 일어설 동안 눈앞에서 멈춘 그녀와, 시선을 맞출 수가 없다.
"안녕, 하루카."
"미키. 왜 여기에 있어……?"
"미키도 허니를 만나러 오고 싶었는걸. 당연하잖아."
"일, 은?"
"정말,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야. 일하는 일본이 이상한 거야. 미키랑 하루카, 오늘부터 새해까지 오프라구? 스케줄 확인 안 했어?"
"아……."
그랬던가. 이젠 요일 감각도 엉망이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게 23일이었을 텐데 다들 왜 유키호 생일 얘길 하는 걸까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차나 이동시간을 생각하니 확실히. 일본은 지금 이브 21시 쯤일까.
치하야 짱과 얘기가 끝나면 곧장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렇구나. 일단 휴일이구나…….
"이, 이번엔 미키랑 무슨 일 있었니? 아냐, 하루카. 어쩌면 좀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루카한테 비행기 티켓을 주라고 부탁한 건 나야! 11월 마지막 날에, 하루카 상태가 이상하다고 미키한테 전화가 와서, 슬슬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초조하게 말을 늘어놓는 프로듀서님 목소리는 반쯤 흘려들으면서, 또 머릿속으로 시차를 생각한다. 일본보다 할리우드가 17시간정도 빠르다. 내가 프로듀서님한테 전화한 건 할리우드에서 11월 30일이었지만. 프로듀서님이 전화를 받았을 때, 여긴 이미 12월에 접어들었을 때다.
하루 먼저. 내 숨길 수 없는 상태를 미키가 눈치 챘던 밤, 프로듀서님한테 연락을 했던 거구나.
정말, 나는.
모두한테 도움만 받고.
……하지만.
"있잖아, 미키."
"왜애?"
"분명히 날 일본에 보내려고 그랬다곤 해도 말야. 미키가 '솔직하게 전부 말할게' 다음에 말했던 건 전부 진심이었지?"
"응."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침묵이 찾아왔다.
내겐 가장 무겁고, 가장 차가운 지금 고요함.
"하루카, 잠깐 이쪽으로 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손을 미키가 잡았다. 그대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데리고 갔다. 평온한 웃음을 지은 채로 날 지긋이 바라보고, 그 발이 멈추었다.
"있지, 하루카. 지금이라면 제대로 미키를 바라봐 줄 거야?"
"……응. 나도 미키가 들어줬음 하는 이야기가 있어."
"들을게."
이번엔 고개를 들고, 똑바로 미키를 바라보았다.
"미안――같은 말은 듣기 싫지?"
"응. 미키도 좀 지나쳤다는 거 알고 있고, 그걸 시작하면 해가 져 버려."
"진작에 져 있지만 말이지."
"아핫."
"그럼 더 뻔뻔한 말 할게. 미키, 새해가 밝으면 다시 한 번. 나랑 같이 연기해 줘."
"그런 부탁이야? 아니면 명령?"
"도전."
"……흐응."
미키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면서, 흥미 없게 대답하면서도.
계속 진지하게 날 바라봐준 걸, 알고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말을 계속한다.
"다시 한 번, '노조미'를 봐 줘."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까, 겨우 뭔가가 개운해졌나봐?"
"응. 이젠 앞을 보는 걸 겁내거나 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럼 하루카는 앞으로 뭘 위해 아이돌을 하는 거야?"
"하고 싶으니까. 어찌됐든 재밌으니까.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그 끝에 있으니까."
"…………."
"나 말야, 쭉 무서웠어. 지금이 정말 좋았으니까. 모두가, 내가, 각각 서로의 길을 걸어가서. 점점 멀어져서, 그것 말고도 소중한 걸 몇 개고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같은 걸로 고민하고. 그 때 그 때 어떻게든 해결해 왔지만. 그건 확실히 끌어안고 목표하는 곳까지 걸어가야 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사람. 아무것도 포기 안 해도 되게, 대단한 아이돌이 될 거야."
"……하루카는 욕심쟁이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거, 엄청 하루카답다고 생각해."
미키가 즐겁게 웃는다.
확실히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제멋대로인 생각을 이룰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건.
하지만 난 노래하는 것. 춤추는 것. 연기하는 것도, 정말 좋아하니까.
주변이 얼마나 대단해 지더라도, 가슴을 펴고 있고 싶은 사람 옆에 있고 싶으니까.
전부 다, 나니까.
"그러니까 옆에서 보고 있어, 미키. 내 '노조미'를, '아마미 하루카'를."
"뭐, 대단한 데까지 가고 싶은 건 미키도 똑같으니까. 어디까지나 따라가 줄게, 하루카."
하지만, 하고 미키는 장난스럽게 내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하루카가 미키 라이벌이 아니게 됐단 건 변함없겠다. 허니 쟁탈전 상대가 둘이나 줄어서, 럭키인 거야."
"그, 그건, 으음……."
"하지만 치하야 상이 하루카 게 돼 버리는 것도 왠지 짜증나네."
"에헤헤……. 어, 근데 미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거기에 없었잖아!?"
"새삼스럽지만, 솔직히 말해서 다 들통 났었어."
미키는 당해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치하야 짱을 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하면서 너무 가까운 미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혹시 치하야 짱은 질투심이 많거나 그런 걸까……?
"……하루카가 미키랑 다른 애들을 계속 봐 왔던 것처럼 말야. 미키도 하루카, 어느 정도는 소중히 보고 있었다구."
뒷걸음질 스텝을 밟으면서, 미키는 양 손을 등 뒤에서 맞잡고 웃었다.
따뜻한 게 가슴속에 넘쳐서.
따뜻한 게 아주 조금, 눈에서 흘러넘쳐서 뺨을 적셨다.
"……응."
"그래서 하루카가 혼자서 고민하면서 상담 안 해줬을 때, 꽤 쓸쓸했으니까 있지?"
"……응, 미안해. 고마워, 미키."
"응. 그럼, 미키는 하루카만 신경 써 줄 수가 없어!"
말하기가 무섭게 미키는 몸을 돌려서 프로듀서님한테 달려갔다. 팔에 달라붙는 미키를 당황하며 떼어내려고 하면서, 프로듀서님이 날 봤다.
"하루카, 추우니까 슬슬 가자! 유키호 생일 파티야."
"――네!"
조금 눈을 비볐다.
폐를 많이 끼쳤는데도, 다들 거기에 있어 주었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말로 전하기 위해서.
가자.
내가 바라는 그곳까지.
축제 소란 뒤에는 늘 쓸쓸함이 떠돌지만.
왠지 오늘은.
"하루카, 쓰레기는 대충 정리 끝났어."
"고마워~. 나도 빨래 거의 다 끝났어."
이제 곧 날짜도 바뀔 시간. 조금 전에 끝난 유키호 생일 파티&크리스마스 파티. 나와 치하야 짱은 여러 가지 사죄를 겸해서 그 뒷정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뭐,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긴 하지만. 그걸 눈치 챈 코토리 상은 "뒤는 젊은 둘이 천천히 보내~."같은 말을 해서, 막 때려 줬다. 그런 코토리 상에게 비디오카메라에 대해서 치하야 짱이 추궁하는 장면도 있었고. 결국 그건 처음부터 녹화한 게 아니라 치하야 짱이 나한테 안겨 왔을 때부터였던 것 같지만……물론 치하야 짱은 카메라를 뺏어서 문답무용으로 메모리를 지워 버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다들 평소와 똑같이 우리들을 받아들여 주었다.
오늘도 모두 다 모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런 건 내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가 돌아올 장소로 있어 주었다.
유키호를 축하하고. 미키와 내 일시 귀국을 기뻐해 주고. 치하야 짱과 나는 놀림 받기도 하고.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워서. 오랜만에 모두 함께 보내는 시간을 모두가 진심으로 즐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내년엔 모두 다 모이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네."
인쇄된 스케줄 표로 완전히 덮인 화이트보드를 보면서 치하야 짱이 말했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역시 쓸쓸해?"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내가 걱정되는지 이쪽을 보는 치하야 짱에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한텐 이제 제대로 된 목표가 있으니까."
"뭔데?"
"톱 아이돌이 되는 거야."
"그거 처음부터 네 꿈이었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은 꽤 구체적이야."
"예를 들면?"
"내년 오늘은 돔에서 라이브를 하는 거야. 다들 모여서."
"후후, 꽤 장대한 계획이구나."
"그럼.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하면, 이런 시기라도 큰 회장을 잡을 수 있을 만한 아이돌이 될 거야."
"정말 제멋대로 굴게 됐구나, 하루카. 아메리칸 풍토란 무서워."
"……미안해. 그래도 난 이제 처음부터 뭔가를 포기하거나 안 할 거야. 이룰 때까지, 타협 안 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내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건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뭘 남 일처럼 말하고 그래."
"어?"
"나,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할 거니까.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치하야 짱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거리가 없어진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구나.
조금 수줍게 웃으면서 치하야 짱이 날 바라본다.
"원하는 건 원한다고 말하고. 하고 싶은 건, 할 거야."
"그래. 그런 하루카는 지금 뭘 하고 싶은데?"
"…………."
"난 '모르는'거지? 아무래도 말로 안 하면 난 이해 못 할 것 같은데?"
뭐야, 이 여유 넘치는 웃음은! 짜증나!
"그건, 있지, 키,"
"키?"
"…………으으."
"왜 그래, 하루카."
"잠깐만, 치하야 짱은 애인한텐 이렇게 못된 짓 하는 사람이었어!?"
"자, 슬슬 안 나가면 나도 막차 놓칠 거야."
"알았어, 알았어! 키스가 하고 싶어! 뽀뽀! 알겠어!?"
자포자기하고 소리치는 나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눈이 살짝 감겼다.
이거, 오케이란 말이지? 하루카 상 갑니다?
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조금 발꿈치를 들었다. 그 입술을 목표로 고정하고, 다가가면서, 나도 눈을 감고――
"알았지만, 안 돼."
"~~~~!!!!"
어느샌가 눈을 뜬 치하야 짱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 닿은 것은, 내가 원했던 그게 아니라 검지손가락이었다.
"왜!!"
"여기 사무소야. 모씨가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해 놨을지도 모르잖아?"
"……그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하루카의 키스는 나만의 것이니까."
치익 치익 하고.
철판 위에 방치 당했다.
저, 슬슬 먹어 주지 않으면 타 버릴 것 같은데요.
뭔가 아까부터 내 취급이 너무하지 않아? 역시 트리 밑에서 얼음물은 무시하고 치하야 짱한테 뽀뽀할 걸 그랬어. 앞으로도 내가 위쪽에서 입맞춤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치하야 짱, 그렇게 여유만만해서 되겠어? 너무 장난치면 언젠가 역습할 거라구?"
"기대해 둘게. 하루카가 멀어지는 것 말고는 뭐든 해도 돼."
그렇게 말하고, 치하야 짱은 빠른 걸음으로 사무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말로 이게 여자 친구한테 할 짓이야?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나서, 이미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뭐, 오늘은 불을 끌 필요는 없지만, 절약은 중요하니까.
한발 먼저 건물 밖에 나온 치하야 짱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겨울 밤바람이 다 드러난 뺨에 차갑게 닿았다.
"정말, 치하야 짱 너무해!"
못된 뒷모습을 쫓아가서 쌓인 화를 쏟아 내고, 그녀의 옆얼굴을 본다.
그 뺨이 새빨갛게 물든 건, 아마 밖이 추워서가 아니고.
그 눈이 조금 젖어 있는 건, 글쎄 왜일까.
그 이유를 파고드는 건 분명 멋없는 일일 테니까.
떠오른 내 입맛대로인 해석을 가슴속에 소중히 담으면서, 그런 치하야 짱을 모르는 척 한다.
"하루카는 오늘 밤 어떡할 거야?"
한동안 말없이 걸었던 역으로 가는 길 위에서, 치하야 짱이 입을 열었다. 물론 진작에 집으로 돌아갈 막차는 끊겼다.
――이쯤일까.
이 이상 따라가면 지금은 아직, 못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난 사무소에서 잘 거야."
갑자기 멈춰선 나를 치하야 짱이 돌아보면서 신기하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일단 물어보겠는데, 왜?"
"내일 곧장 미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아직 못 끝내고 온 게 있어서."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사무소에서 프로듀서님과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저, 프로듀서님. 이번엔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나도 잘못했어. 미안하다.』
『그건 이제 됐어요. 전부 우리들을 생각해서 그랬던 거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앞으로……말인데요.』
『왜?』
『죄송합니다. 저, 그쪽에서 제대로 일 못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가 너무 어중간해서.』
『――그렇구나. 그럼 하루카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전 이제, 제가 그린 미래에서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어요. 아이돌인 미래도, 치하야 짱과의 미래도.』
『………….』
『어쩌면 잘못됐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폐 끼칠지도 모르는데요――』
『하루카.』
『네?』
『그건 열심히 생각해서 낸 결론이지?』
『……네.』
『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단은 전부 옳은 거라고 생각해. 하루카가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걷는 길이라면, 난 등을 밀어줄 뿐이야. 다른 건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걸까요?』
『어차피 진지하게 생각해서 발견한 길을 안 고르면, 그걸 곁눈질로 보면서 계속 후회할 뿐이니까. 그런 인생은 즐겁지도 않고 큰 가치도 없어. 그럼 하루카는 다음에 뭘 하고 싶니?』
『전――휴가이긴 하지만, 바로 할리우드로 돌아가고 싶어요.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저쪽에서도 폐를 끼친 사람이 잔뜩 있으니까요.』
『그거면 된 거지?』
『네. 앞으로 걸어가기 위한, 제 나름의 각오예요.』
『그럼, 이걸 줄게.』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행, 티켓?』
『내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치고. 하루카라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준비해 뒀었거든.』
『――! 감사합니다.』
『좀 멋있는 말도 생각했었는데, 말하지는 않을게. 하루카가 한 선택은, 언제든 분명 베스트일 거야. 열심히 하렴.』
『네! 치하야 짱이랑 다른 애들도 잘 부탁드려요!』
『그래. 이쪽은 맡겨 둬.』
치하야 짱의 눈을 지긋이 바라본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할 걸 그랬을까.
잠깐 있다가, 치하야 짱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하루카와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아, 위험해. 솔직히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
"그래도 하루카가 결정한 거라면. 전부 나중으로 미뤄야겠네."
뭔가 우스운 것처럼. 하지만 신뢰가 담긴 눈빛을 내게 보내 주니까.
"아까 굉장히 중요한 걸 치하야 짱이 뒤로 미뤘으니까, 그 복수야. 날 보고 싶은 마음에 몸부림치라구.
"그럼 그렇게 할게. 다음에 만났을 땐 각오해."
나도 이번엔 재회를 믿을 수 있으니까. 이번엔 가슴을 펴고 치하야 짱 옆에 서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이별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행을.
"응. ――다녀올게, 치하야 짱."
"다녀와, 하루카."
발을 돌려 지금은 나만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제 무섭지 않다.
목표할 곳도, 돌아와야 할 곳도 있다.
앞으로 내가 고를 길은 전부, 치하야 짱과 함께하는 미래로만 이어져 있으니까.
고민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그리고 다시 한 번 만났을 때에는.
치하야 짱은, 나의――
나는, 치하야 짱의――
믿음직하지 못할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그만 해 줬으면. 내버려 뒀으면.
지금 난, 도저히 아이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가로등은 용서 없이 내 눈앞에 늘어서 있다.
잠깐 멈춰서 칠칠치 못한 표정을 감추듯이 목도리를 다시 감았다.
첫 시련은 정말 별것 아니라고 한숨을 쉬고 싶으면서도.
연이은 빛들이 가리키는 그 끝으로.
난 내가 바라는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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