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하루카와 보냈던 언덕 위의 거목은 분홍빛을 상당히 잃어버렸지만, 오늘도 당당히 서 있다.
어제 하루카의 그늘진 표정이 떠올라서, 리츠코가 말하는 원소에 대한 설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헤어질 때 하루카는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괴롭고 쓸쓸해 보이는 눈은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내가 상처를 준 거다. 내 얕은 생각과 언동 때문에. 또 내가.
"물질을 변화시킬 때 통감했겠지만, 이 세상에서 형태가 있는 물건의 구조를 아주 작은 단위에서 이해하는 건――"
대체 나는 앞으로 얼마만큼의 후회를 쌓아가는 걸까.
아이돌이 되면 더이상 이런 걸로 고민할 일도 없어지는 걸까.
"자연계에 존재하는 건 원자번호 92번 우라늄까지인데 현재는 118종이 발견돼 있고, 능력을 쓰기에 따라선――"
아니면. 아즈사 상을, 타카츠키 상을, 가나하 상을, 하기와라 상을, 마코토를, 리츠코를, 미나세 상을, 그리고 하루카를. 누군가의 마음을 붙드는 건, 내 손으론 어쩔 수 없을 만큼 버거운 일인 것일까. 죄로 더럽혀진 이 손으로는.
실제로 어제 리츠코가 내게 아이돌의 소질이 있다고 말하고 나서, 미나세 상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루카도 내가 그녀를 위해 아이돌이 되겠다느니 하는 말을 꺼내서 곤란하게 만들고 말았다. 설령 아이돌이 되더라도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면, 애초에 내가 여기 있는 의미는――
갑작스런 수업 끝 종이 리츠코의 설명과 내 생각을 중단시켰다.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아, 그리고 또 하나. 너희들한테 줄 게 있어."
갑자기 교실 안이 시끄러워진다. 뭔가 좋은 물건일지, 아니면 대량의 과제일지. 기대와 불안과 흥미가 모두의 눈을 바쁘게 빛낸다.
교단 앞에 한명씩 불려 나가서 리츠코에게 물건을 받는다. 내 차례가 되어서 앞에 나가 일단 인사를 하고, 자리에 돌아와 건네받은 꾸러미 속을 확인한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건――옷? 교복이라기 보단……의상? 흰 바탕에, 옷깃과 큰 단추 같은 것들은 선명한 파랑이다. 대체 누구 취향이고 뭘 위해서……?
"이게 뭐야! 촌스러운 건지 귀여운 건지 잘 모르겠어!"
옷을 꺼내서 펼쳐 보면서 소박한 곤혹을 입에 담는 것은 미나세 상. 격하게 동의한다. 그녀 것도 내 것과 거의 같은 모양이지만, 색이 들어간 어깨와 벨트 등은 핑크색으로 되어 있었다. 귀여운 옷인 건 분명하지만 평소에 입는 물건인가 하면 틀림없이 아니다.
"그건 성스러운 옷. 착용한 자의 능력을 효율 좋게 끌어내고, 아픔이나 고통을 경감시킵니다."
"뭐, 뭔가 파워 업 아이템 같아서 굉장한데!?"
리츠코의 막연한 설명에 가나하 상이 감탄하며 성의인지 뭔지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덧붙여서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속옷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단해, 이젠 뭘 위한 건지 모르겠어!?"
마코토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을 더해갈수록 수상함이 증가해 간다. 이렇게 무릎 위로 뽀롱뽀롱하면서 속옷이 안 보인다고? 무슨 원리야. 신경쓰면 지는 건가. 게다가,
"저, 그래서……왜 저희한테 이걸?"
아즈사 상이 가장 묻고 싶었던 의문을 말해 주었다. 리츠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유비무환이란 거에요. 마음속으로 염원하면 바로 그걸로 갈아입을 수 있으니 기억해 두세요."
어렸을 때 본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 이건 그거다. 그런 변신 코스튬과 비슷하다. 설마 이 나이에 얻을 기회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전혀 입을 기회가 없기를 빌고 싶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수업은 끝. 아, 그리고 야요이!"
또 있는 건가, 모두가 손에 든 성의(가칭)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밥 먹고 나면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교무실로 와."
"우? 네~."
타카츠키 상이 순순히 대답하는 걸 확인하고, 리츠코가 교실에서 나갔다.
일단 이건 옷장 깊은 곳에 봉인해두기로 하고.
이번 점심시간. 하루카는 그곳에 와 줄까.
………
……
…
기다려도 기다려도 하루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 일부를 어디 두고 온 것처럼, 그저 멍하니 조금 두꺼운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문고본은 가져오지 않았다. 시간을 때울 것을 준비하는 건 하루카가 올 거라고 믿지 않는 것 같아서 싫었으니까.
또 늦잠일까. 오늘도 나, 아직 점심 안 먹었는데. 쿠키를 잔뜩 들고 와 준다면 조금쯤 지각한 건 너그럽게 봐 줄게.
그러니――
작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도 반 이상이 지났을 때쯤. 아아, 하루카는 안 오는구나. 그렇게 쓸쓸한 확신을 얻었다.
아이돌 후보의 미래 예지, 그런 건 필요 없다. 어제 난 보고 말았다. 하루카의 고민, 괴로운 듯한 눈을.
치마에 붙은 풀을 털고 천천히 일어나 언덕을 내려간다.
한 번 돌아보자, 며칠간 좋은 등받이가 되어 주었던 거목은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바람에 꽃가지를 흔들고 있다.
우둔하게 계속 서 있는 벚나무를 조금 부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오는 건 안 오는 거야. 상처를 준 내가 잘못한 거니까.
이제 여기 올 일은 없겠지. 독서를 할 땐 다른 곳을 고르자. 곧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도 온다. 어차피 계속 여기 있을 순 없다는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지 않고 교사를 향한다.
현관이 보였을 때쯤, 야요이가 리츠코를 따라 교사 뒤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아까 리츠코가 얘기할 게 있다고 했던가.
교대하듯이 신발장 앞에서 신을 벗다가, 어라.
리츠코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뿐이라면 굳이 직원실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이제 수업 시작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절대로 남한텐 들려주고 싶지 않은 얘기라면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적어도 목적지만이라도 확인해 두려고 빠른 걸음으로 리츠코가 향한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현관에서 다시 나오자 샛길의 나무들 안쪽에서 또 타카츠키 상의 등이 보였다. 저쪽은……구교사? 요 1년간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는 곳이다. 애초에 복도 판자가 썩어서 위험하단 이유로 출입금지였을 것이다. 왜 구교사에.
지금 교사와 구교사를 잇는 샛길에 들어갈 때 마이크와 스탠드를 본딴 듯한 조각상을 발견했다. 이런 데는 온 적이 없어서 저런 것도 처음 봤다. 어차피 졸업할 때까지 이 학원의 절반도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타카츠키 상을 쫓아 발걸음을 빨리했다.
역시 그녀들은 구교사로 들어갔다. 놓치지 않도록, 하지만 발이 썩은 나무를 밟아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뒤를 쫓아간다.
계단을 한번 올라서 더 안쪽으로. 리츠코와 타카츠키 상은 그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완전히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 그림자에서 나와 둘이 들어간 교실 앞에 선다. 방의 용도를 보여 주는 플레이트는 이미 문자가 닳아서 읽을 수 없다. 지금까지 봤던 구교사의 평범한 교실 구조와는 다르니, 특수한 수업에 쓰이는 곳이겠지. 문에 유리도 없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이제 돌아가려던 참에, 문과 벽 사이에 틈이 있는 걸 깨달았다. 오래된 탓에 문짝이 잘 맞지 않게 된 거겠지. ……여기로라면.
숨을 죽이고 작은 틈새에 한쪽 눈을 맞춘다.
안쪽 광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소리가 나올 뻔해서 허둥지둥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붉은 색인지 오렌지 색인지, 그런 조명이 비추는 실내에서.
리츠코는 한 주사기 끝을, 교복 윗도리를 벗은 타카츠키 상의 팔에 찌르고 있었다. 황록색으로 빛나는 기분 나쁜 액체가 타카츠키 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더 큰 충격에 난 눈을 크게 떴다.
타카츠키 상의 눈. 언제나 쾌활하게 빛나는 그 눈은,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붉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대체 리츠코는 타카츠키 상에게 무슨 짓을――?
보고 있는 광경에 이해가 따라가지 못해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무슨 병의 치료인가? 아니면.
기분 나쁜 생각을 떨쳐 내고,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히 뒷걸음질친다.
어느 쪽이 됐든 입밖으로 내선 안되는 일이거나, 나로선 감당할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만약 점심시간이 끝나도 타카츠키 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애들에게 지금 본 것을 털어놓고 상담하자.
방을 뒤로하고 구교사 출구를 향한다. 기분 나쁜 땀이 이마에 흘렀다.
밖에 나오기 직전, 나도 모르게 뛰쳐나간 내 발이 낡아빠진 복도의 판자 하나를 부수었다.
삐그덕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신발 끝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다.
그것은, 당연했을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이 소설은 픽시브에서 타마키 하야테(珠樹 颯)님이 연재하신 소설입니다. 허가를 받고 카와즈(かわづ)가 번역하였습니다. 원작자의 허가로, 이 소설은 작가와 번역가의 이름, 출처를 명기하면 전재가 가능합니다. 또한, 이 소설에 코멘트된 감상은 원작자에게도 전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설의 원본 주소 : http://www.pixiv.net/novel/show.php?id=4611857